[세상만사-장지영] 앙드레 말로와 자크 랑

국민일보

[세상만사-장지영] 앙드레 말로와 자크 랑

입력 2017-05-18 18:32

기사사진

프랑스 문화정책은 흔히 두 명의 문화부 장관으로 설명된다. 앙드레 말로와 자크 랑이다. ‘정복자’ ‘인간의 조건’ 등의 소설을 쓴 대문호 말로는 1958년 샤를 드골 대통령이 세계에서 처음 독립부처로 창설한 문화부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돼 10년간 재직했다. 그리고 변호사 출신인 랑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인 1981∼86년, 1988∼93년 두 차례 10년간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말로는 ‘문화 민주화’를 표방한 문화정책을 추구했다.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향유 기회를 늘리는 정책이다. 대표적인 것이 파리의 예술 작품을 지방 곳곳에 전파하기 위한 ‘문화의 집’ 설립이다. 이를 통해 문화예술과 괴리된 삶을 살아온 국민 대부분의 감수성이 개발될 것으로 기대했다.

말로의 정책은 강력한 문화재 보호 조치를 비롯해 정부와 지방을 연결하는 지방문화행정사무국 설립 등 긍정적 요소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엘리트 입장에서 대중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보급 정책이었다는 비판을 초래했다.

문화 민주화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문화정책 개념이 ‘문화 민주주의’다. 문화의 다양성을 중시하며, 일반 국민들을 단순 수용자가 아니라 문화 생산에도 적극 참여하는 주체로 인식한 것이 특징이다.

문화 민주주의를 앞세운 랑은 서커스, 만화, 요리, 패션 등 비주류 분야를 문화예술에 포함시킴으로써 문화 대중화를 도모했다.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건설, 루브르 미술관 증축 등 파리의 대형 문화시설을 잇따라 건설한 ‘그랑 트라보’가 추진된 것도 이때다. 이와 함께 말로 시절 8개로 출발한 지방문화행정사무국을 22개로 늘려 문화예술의 지방 분산화 정책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랑의 정책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문화예산이 국가 예산의 1%를 처음으로 넘겼지만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그랑 트라보 때문에 문화예술 발전에 필요한 실질 예산은 부족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의 모든 예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미국식 대중문화화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현재 프랑스 문화정책은 우파 공화당 정권의 말로와 좌파 사회당 정권의 랑이 펼쳤던 정책을 수정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정치적 색깔은 다르지만 두 장관 모두 문화예술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공공재라는 인식을 가졌다. 이를 위해 문화정책 실현을 위한 시스템을 중시했으며, 임기 내내 단계적으로 구축했다.

한국은 프랑스만큼은 아니지만 국가 주도의 문화정책을 펴는 나라다. 실제로 산하 기관과 단체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문화정책이 지속적이고 발전적으로 수행됐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직이 바뀌는 등 외풍에 취약했던 문체부가 제대로 된 문화정책을 펼치기란 쉽지 않다. 문화예술에 대한 철학과 이해가 없는 인사들이 장·차관을 꿰차고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 수동적으로 따르면서 적지 않은 예산을 쓰고도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문체부가 박근혜정권 시절 국정농단의 주무대가 되고 문화예술계를 황폐화시킨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것은 오랜 무능과 무책임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문체부가 장기적 관점에서 문화예술계가 발전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작동하지 않거나 왜곡됐던 시스템 구축에 나서야 한다. 임기응변식 처방이나 일회성 사업은 이제 한계에 달한 상황이다. 물론 처음엔 쉽지 않겠지만 문화예술계가 유기적으로 돌아가려면 곳곳의 적폐를 개혁해야 한다.

장지영 문화부 차장 jyjang@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