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 공감

국민일보

[감성노트] 공감

입력 2017-05-1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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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가면 아침이 오지만 가슴은 무너지는구나’ 월터 랭글리
인간은 누구나 공감받기를 원한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심지어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정치인을 향해서도 “내 심정을 진정으로 알아 달라”고 호소한다. 수년 전 유명 정치인이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고, 동정(sympathy)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정확하다.

동정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남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것이다. 동정에는 타인의 아픔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며 ‘저 사람을 보니 나는 아직 괜찮게 살고 있네’라는 우월감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동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참혹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삶을 안방에서 지켜보고 얼마씩 기부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감정”이라고. 값싼 동정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보다.

동정 아닌 공감을 실천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동정을 해 놓고도 “공감했다”라고 우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공감 능력은 유한 자원이다. 공감도 너무 많이 하면 피로에 빠진다. 공감 에너지를 완전 소모해 버려서 마음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공감 피로’라고 부른다. 일종의 감정 탈진이다. 병든 가족을 오랫동안 돌보고 있는 사람이나, 중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나 간호사가 이런 상태에 빠지기 쉽다. 정신과 의사인 내게도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당신의 고통에 저도 공감합니다”고 해놓고 제대로 공감했을까라고 스스로 되묻는 경우가 있다. 직접 경험하고 똑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는 처절하게 이해하고 느낄 수 없다다면, 공감이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감정일 거다.

5·18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이 한 여성을 안으며 위로해주는 사진을 봤다. 뭉클했다. 동정이 아니라 공감의 느낌이 전해져서다. 그가 공감의 불가능성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타인의 아픔이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은 비탄에 빠진 사람을 품어 안으며 같이 눈물 흘리는 것 아닐까라고.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반려인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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