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의 작은 천국] 이 빠진 어린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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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의 작은 천국] 이 빠진 어린이날

입력 2017-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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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물한계곡교회 목사가 지난 5일 어린이날 충북 영동 용두공원에서 교회 어린이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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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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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어린이날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놉니다. 부모 없는 조손가정의 아이들이나 부모가 있어도 농사일 때문에 바쁜 아이들만 불러내 같이 보냅니다.

뷔페에 가서 점심을 먹고 한적한 시골길로 들어왔습니다. 초록빛 가지들이 넘실대는 시골의 작은 오솔길을 함께 손 잡고 걸으며 노래하고 끝말잇기 하며 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씩씩하고 잘 놀던 일곱 살 원율이의 표정이 좀 이상합니다. 어리지만 웬만해서는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재기발랄하게 잘 노는 아이입니다. 원율이가 바람처럼 내 곁을 휙 달려가며 한 마디 툭 던지고 갑니다. “이빨 흔들려요.” 나는 원율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입을 벌려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손가락 끝을 흔들리는 앞니 위에 살짝 올려놓고 흔들어보았습니다. 원율이가 잔뜩 움츠리며 경계합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흔들리는 정도를 가늠했습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젖니를 많이 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젖니가 빠지려고 흔들릴 때 거기서 오는 통증과 낯선 느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요. 나는 실눈을 뜨고 원율이를 내려다보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움츠렸던 아이의 몸에 긴장이 풀리고 내 품에 편안하게 안겼습니다. 젖니는 이미 중심을 잃고 마지막 남은 뿌리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 뿌리에서 징소리처럼 울리는, 통증의 까실함이 원율이를 얼마나 괴롭혔을까 생각하니 애잔해집니다. 가지를 흔드는 초록 바람이 아이의 귓불을 살짝 지나갈 때 손끝에 힘을 주고 휙 재껴버렸습니다. 분홍색 잇몸 사이로 양귀비꽃잎 같이 핏방울이 맺혔습니다.

늘 그 자리에 단단하게 고정돼있던 치아, 결코 물러지거나 깨어지지 않을 그 견고한 몸의 한 부분이 한순간에 허망하게 부러져서 제 자리를 이탈한 상태, 그것은 젖니를 처음 뺀 아이가 인생에서 처음 느끼는 상실감과 허무감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군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의 느낌 같은, 스승을 잃은 예수의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마음일 것입니다.

인생은 상실과 허무의 강물 위에 노를 잃고 무력하게 흘러가는 것이라는 걸 젖니를 빼는 시기에 느끼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시작은 그 느낌을 아는 때부터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이탈하여 세상에 나온 것이 삶의 시작이라면 상실과 허무를 아는 때가 인생의 시작입니다.

“너는 이제 형아가 된 거야.” 어린애 취급 받는 것을 싫어하던 아이에게 형이 되었다는 말이 금방 기쁨을 줍니다. 눈물 젖은 얼굴에 형이 됐다는 성취감으로 미소가 번집니다.

상실과 기쁨, 두려움과 소망 같은 서로 다른 질감들이 나뭇가지처럼 인생을 흔듭니다. 아, 인생은 상실과 허무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소망과 기쁨의 나무입니다. 인생은 수많은 역설로 가득한 우주의 은유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우주는 수많은 역설로 충만한 인생의 은유인지도 모릅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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