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기호] ‘수월성’은 사전에 없어요

국민일보

[청사초롱-이기호] ‘수월성’은 사전에 없어요

입력 2017-07-1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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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억 하나.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예술고등학교가 흔치 않았다. 전국 단위로 서너 개가 있었을까? 그만큼 희소했기 때문에 그런 고등학교가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학생이 태반이었다. 그럼 그때 미대나 음대 진학을 희망했던 학생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냥 일반고에서 다른 학생과 똑같이 배웠다. 약간 다른 점이라곤 야간 자율학습을 빼주는 정도. 그것만으로도 다른 학생들에게 우와, 부러움을 샀다. 머리를 기르고 좀 이상한 말을 해도, 쟤는 예술 하는 아이니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러고도 모두 예술대학에 잘만 진학했다. 시간이 지나 나와 엇비슷한 또래의 화가들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일반고 출신자였다.

또 다른 기억 하나. 서른 살 초반에 한 예술고등학교에서 실기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 주 2회 4시간씩 학생들의 소설을 지도해주는 일이었는데, 거기 처음 나갔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고등학생들이 소설을 너무 잘 쓰는 것이었다! 문장이나 구성에 이르기까지 현직 작가인 나와 얼추 비슷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앗, 이 친구들은 모두 다 천재구나, 강의하면서 주눅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그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무언가 조금 이상한 걸 발견하게 됐다. 문장도 좋고 구성도 빈틈없는데, 그 친구들 글엔 어쩐지 매력 같은 것이 빠져 있었다. 무언가를 따라 하려고 쓴 것 같고, 틀에 맞춰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글 속에 그 친구들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그 친구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말하자면 거기는 문학 하는 친구들만 모인 학교였다. 창작 수업 비중이 가장 높고, 각자가 쓴 글로 경쟁하는 학교. 그러니 그 친구들이 쓰는 글은 말 그대로 소설을 위한 소설, 동료와의 경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멀게는 삼십 년, 짧게는 십오 년 전 옛 기억을 꺼낸 이유는 ‘수월성’이란 낯선 단어 때문이다. 자사고를 폐지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획일화된 교육만 남고 수월성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한 교장선생님의 목소리를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수월성’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하지만 거기엔 그런 단어가 나와 있지 않았다. 대신 ‘까다롭거나 힘들지 않아 하기 쉽다’의 뜻을 지닌 ‘수월하다’만 나와 있었을 뿐. 그래서 살짝 오해하기도 했다. 아아,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뽑아서 가르치니까 힘들지 않고 하기 쉽다는 뜻이구나.

하지만 그러자니 문맥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더 많은 책을 찾아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저 정체불명의 ‘수월성’이란 단어의 뜻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많은 교육학자가 지적했듯 ‘수월성’이란 단어는 미국의 교육 정책에서 온 ‘Excellence in Education’에서 비롯된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엘리트 교육’이란 단어를 쓰기 부끄러웠는지, 그도 아니면 그 안에 포함된 이데올로기를 감추기 위해서였는지 사전에도 없는 말을 창조해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자사고 존치론자들이 말하는 ‘수월성’ 교육이란 ‘엘리트’ 교육이란 뜻이다.

사실 많은 교육학자들이 말하는 ‘Excellence in Education’은 아이들을 의사나 판사, 회계사로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다. 의사를 더 의사답게, 판사를 더 판사답게 만드는 교육이다. 의사를 의사답게, 판사를 더 판사답게 만드는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차이를 인식하고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그 옛날 미술을 전공하던 내 친구들이 나와 같은 교실에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차이와 공감. 거기에서부터 그들의 그림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당연하게도 의사를 더 의사답게 만드는 것은, 동료 의사가 아닌, 수많은 환자들이다. 의사끼리만 모여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없다. 자사고나 외고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이기호 광주대 교수·소설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