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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마침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다

소설가 김동인 서울 옛집과 어린이대공원 동상

입력 2017-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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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대행소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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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십계명을 깨는 모세’ (1659년 작/캔버스에 유채/ 169×137㎝/독일 베를린 국립회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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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진 김동인 흉상. 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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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김동인과 김경애의 결혼식 사진(왼쪽)과 서울 홍익동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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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 한 장 없다. 쓸 분량만큼 원고지를 미리 책으로 만들어 쪽수까지 매긴 후에 수정을 하지 않고 단번에 써 내려갔다. 글을 얼마나 빨리 썼는지 신문에 2회분씩 쓰는 것도 30분 이내로 썼다. 글을 쓸 적에 원고지 넘기는 소리가 마치 글을 읽을 때 책장 넘기 듯했다. 그는 천재 작가였을까. 한국의 명(名)단편으로 꼽히는 ‘감자’ ‘배따라기’ ‘발가락이 닮았다’의 작가 김동인(1900∼1951)은 그렇게 소설을 일필휘지(一筆揮之)했다. 이광수 염상섭 현진건 등과 함께 한국 근대문학 개척기에 활약한 중요한 작가다. 1919년 2월 그가 주도해 발간한 한국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동인은 평안남도 평양의 토착 부호이며 장로인 김대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김동인이 기독교 진리와 상반되는 예술지상주의 또는 사실주의 계열 작품을 많이 썼지만, 상당수 작품에는 성경구절을 인용했고 기독교 윤리를 소재로 삼았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 잔을’ ‘명문’ ‘신앙으로’ ‘순교자’ 등이다.

능소화 만발한 작가의 옛집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서울 성동구 홍익동의 집을 최근 찾았다. 능소화 덩굴이 아름드리 늘어져 있는 철대문 문패엔 작가의 차남 김광명 한양대 의대 명예교수의 이름이 쓰여 있다. 원래 이 집은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었으나 1983년 3층 양옥집으로 개축해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김 교수는 은퇴 후 경기도 양평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그의 아들 내외가 살고 있다. 오랜 시간 이 주택을 지켜온 마당의 작은 연못과 감나무를 바라보며 60여년 전 이곳에서 사색을 즐겼을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아버지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서 직접 전지가위를 들고 가지치기를 하셨다. 또 아버지는 불면증이 심했는데 대개 밤에 원고를 쓰다보니 아침에 일어나 요비링으로 부르기 전에 방에 가선 안 되었다. 아버지는 아침을 늦게 드셨고 매일 외출을 하셨지만 일찍 집에 돌아오셨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도 별로 없었으며 일은 대개 전화로 짧게 해결하셨다.”(김광명 ‘나의 아버지 김동인을 말한다’ 중)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과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해 생소한 창작방법론을 시도했다. 개신교 장로가 부친인 가정과 주일학교, 미션계 초·중·고교에서 배운 대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어 놓은 세계보다 더 자기다운 세계를 짓기 위해 예술을 한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나은 위치에 두려는 낯선 구상을 했다. “하나님이 지은 세계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어떤 불완전한 세계이든 간에 자기의 정력과 힘으로써 지어 놓은 뒤에야 처음으로 만족하는 인생의 위대한 창조성에서 말미암아 예술이 생겨났다.”(김동인 ‘자기의 창조한 세계’ 중)

죄의식 부재의 생소성

192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명문’은 전통윤리와 기독교 윤리의 대립,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이 스토리의 골격이다. 작가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전 주사’란 인물을 통해 기독교인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했다. 전 주사는 왜곡된 기독교적 신념을 갖고 있는 인물로 선행하는 마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정당화된다고 믿는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것을 선행이라 여기고, 치매로 고통 받는 어머니를 편하게 해준다는 생각으로 죽게 만들고도 죄의식이 없다. 작가는 기독교적 신념에 따라 살고 싶거든 목적과 수단이 모두 정당한 방법을 따르며 살라고 말한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1923년 발표한 단편 ‘이 잔을’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겪는 삶과 죽음의 고비가 중심 이야기다. 작품에서 제자들의 ‘잠’과 ‘깨임’의 되풀이는 암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잠들어 있는 민중을 ‘깨임’으로 이끌기 위한 예수의 결단은 횃불을 들고 어둠 속에서 음모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뒤따르는 제사장들의 행동에 의해 더욱 선명해진다.

1932년 발표한 서간체 소설 ‘순교자’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한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그의 신앙고백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진병도씨는 논문 ‘‘명문’과 ‘신들의 미소’에 비친 기독교 사상’에서 이렇게 밝혔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걸작들을 창작했다. 그러나 ‘순교자’를 1932년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기를 전후해 그는 야담 작가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순교자 속에 자신이 창작의 기조로 삼는다고 선언한 ‘자기의 창조한 세계’를 버리는, 즉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오기로 작정한 일대 개혁을 숨겨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저항했기에 걸작이 쓰였으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기로 작정을 하자 그의 창작력은 훨씬 수그러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동인의 말년은 불우했다. 아들 김광명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1949년 중풍으로 쓰러진 김동인은 이듬해 6·25전쟁이 터진 뒤 도저히 한강을 건너 피란을 갈 수 없었다. 그해 말 연합군의 퇴각설에 부인(김경애)은 아이들부터 한강 건너로 피란시킨 뒤 남편을 돌보러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하지만 1951년 1월 3일 집을 떠난 부인은 8월에야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집 안에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20m 정도 떨어진 밭고랑에서 잠옷을 입은 작가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인이 2008년 97살로 눈을 감을 때까지 함구했던 슬픈 이야기이다.

김동인은 일생에 걸쳐 장편 15편 이상과 단편 75편 이상을 발표했다. 작품 속에서 낭만주의 자연주의 탐미주의 사실주의 같은 다양한 경향을 시도했다. 그의 문학을 기념하는 문학비와 동상이 옛집에서 멀지 않은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앞에 세워져 있다.

[김동인처럼 생각하기]

“사랑과 미움은 美다”


“나는 선과 미, 이 상반된 양자 사이에 합치점을 발견하려 하였다. 나는 온갖 것을 ‘미’의 아래 잡아넣으려 하였다. 나의 욕구는 모두 다 미다. 미는 미다. 미의 반대의 것도 미다. 사랑도 미나 미움 또한 미다. 선도 미인 동시에 악도 또한 미다.”(김동인 ‘한국 근대소설고’ 중)

김동인의 소설 대부분은 형식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이야기를 제재로 삼고 있다. 자살 살인 이상심리 범죄행위 등이 번번이 등장한다. 극단적인 상황 혹은 비극적 운명에 빠진 인물들을 줄거리 위주로 냉정하게 서술한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자신의 의지에 따르기보다 운명과 환경에 지배를 당하는 경향이 짙다.

그는 소설을 인간성의 비밀을 탐구하고 규명하는 ‘실험 보고서’로 파악하려는 특유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실험 정신의 소산이다. 시대정신이나 사회적 현실이라는 각도에서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심리적 각도에서 인간을 관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 행위의 근본적 동기를 파악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김동인은 기독교 계율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비판했고,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 합리화, 즉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했던 인간심리를 탐구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없이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가졌다.

글=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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