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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나귀의 노래

입력 2017-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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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대행소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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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는 예수님의 생애에 카메오처럼 깜짝 등장하는 동물이다. 공생애의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몇 마리의 말이 이끄는 황금마차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말과 달리 나귀는 몸집이 작고 다리는 짧으며 목덜미에 아름다운 긴 털도 없다. 높이 앉아 내려다보는 말과 달리 나귀에게는 그와 같은 위엄이 전혀 없다.

그동안 수많은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때마다 그들이 타고 왔던 것은 나귀가 아닌 화려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온의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선지자 스가랴는 겸손한 짐승 위에 타신 메시아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나귀는 성경이 번역 보급되던 무렵, 조선의 권서(勸書)들에게는 없어선 안 될 동역자요 벗이었다.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이 한글로 번역된 후 간행된 복음서들이 조선에 반입되어 유포되기 시작했다. 당시 권서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며 단편성경을 팔거나 배포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다니다가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자를 만나면 그곳에서 밤을 새워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5년 보은교회 창립에 공을 세운 권서인 김성호에게도 나귀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나귀는 힘든 고갯길도 쾌활하게 잘 넘어 다녀 ‘종달새’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종달새’가 죽자 김 권서는 그를 애도하는 글을 썼고 그 글이 선교사를 통해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처럼 밖으로는 고되지만 안으로는 종달새의 노래가 있었던 이들이 바로 이 권서들이었다. 그들은 형편없는 식사에 누추한 객사에서 잠을 자며 또다시 먼 길을 떠나야 했지만 사명감이 넘쳤다. 비록 말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몇 배나 되는 크기의 짐을 싣고 묵묵히 일하는 나귀와 같은 숨은 일꾼들이었다. 그들의 짐은 크고 멍에는 무거웠지만 그들의 영혼은 기쁨과 은총을 약속받았다.

남이 모르는 ‘사명’의 신비는 겉으로는 힘들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즐겁다는 것이다. 사명은 ‘아우토텔로스(autotelos)’이기 때문이다. 희랍어 ‘아우토’는 자신(self)을 의미하고 ‘텔로스’는 목적(goal)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아우토텔로스’는 목적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사명은 ‘자기 목적성’을 갖고 있다. 사명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다른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칭찬이나 박수를 바라지 않는다. 그 자체가 보상이며 즐거움이다.

윤동주는 그의 시 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노래했다. 괴로웠던 사나이와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그 대립의 형용모순이 한 인물의 생애 속에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사명의 신비다. 윤동주의 십자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이 담겨 있다.

가난하던 시절 집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장에 나가 양식을 구해 머리에 이고 고개를 넘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때 어머니의 심정은 “무거울수록 가벼워라”일 것이다.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 큰 기쁨과 감사가 있다. 밖에서 볼 땐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지만 안에서 느끼는 것은 참된 행복이다.

우리가 만일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세상 속으로 실어 나른 저 나귀처럼 사명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성공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명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을 싣도록 허락받은 어떤 나귀와 같이 사명을 기쁘게 짐으로 신비의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 아닐까.

박노훈(신촌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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