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칼럼] 가계부채 1400조원, 은행은 책임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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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칼럼] 가계부채 1400조원, 은행은 책임 없나

입력 2017-09-0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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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1400조원 시대다. 지난 6월 말 현재 가계부채는 1388조원, 최근의 증가 추이와 계절적 요인 등을 감안하면 8월 말 기준 1400조원을 넘었을 것이 확실시된다.

부채는 박근혜정부 때 폭증했다. 취임 첫해인 2013년 4월 1019조원에서 4년 만에 400조원 정도 증가했다. 이전과는 비교 불가한 급등세다. 2014년 8월 LTV(주택담보인정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를 완화해 ‘빚을 내 집을 사라’는 정책 도입이 첫 번째 원인이다. 박 정부 당시 줄기차게 추진한 구조조정 여파로 양산된 실업자의 과도한 자영업 진출은 두 번째 이유다. 너도 나도 은행돈으로 아파트를 샀고, 퇴출된 직장인은 빚을 내 가게를 차리는 양상이 속출했다.

부채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전 정권의 전비(前非)는 문재인정부에 엄혹한 현실이었다. 정부는 이달 중순쯤 가계부채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대략적인 얼개는 이미 알려졌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은행을 겨눈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은행의 기존 영업 행태를 꾸짖고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반영된 것이다. 정부는 가계대출 폭증 이면에 은행의 탐욕과 무책임이 있다고 보고 이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

은행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최근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올 상반기 주요 시중은행은 각각 1조원 이상의 순이익을 냈다. 사상 최고 실적이다. 이자수익이 무려 18조원 늘었기 때문이다. 전년 동기 대비 1조1000억원 많은 규모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에 편승해 대출금리를 앞다퉈 올린 덕분이다.

우리 가계부채의 특징은 주택 등 부동산담보대출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수익과 안전’을 모두 챙길 수 있는 구조다. 대출자가 상환을 못해 담보물을 경매에 넘기면 대체로 LTV의 90%까지 회수한다. 상환액이 부족하면 채무자의 다른 부동산이나 소득과 급여를 압류하면 된다. ‘상환청구권’을 행사해 끝까지 받아낸다.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이유는 채무자가 빚을 갚을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빚을 받아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금융 경구가 여지없이 실현되는 것이다. 국민들이 천문학적 빚에 억눌리는 한편에 은행은 1억원에 육박하는 평균 연봉, 고액의 성과급, 공적자금이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아쉬움 없는 조직이 됐다.

은행은 한때 ‘금융회사’가 아니라 ‘금융기관’으로 불렸다. 기업으로서의 이익 추구만이 아니라 공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은행은 신뢰를 상징하는 기관이었다. 상호신용금고가 ‘저축은행’이란 현재의 명칭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는지는 금융권 주변에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러나 지금 은행은 혹독하게 비판받고 있다. 금융 당국 수장이 스스럼없이 ‘전당포’라고 폄하했다. 금융 시스템이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취약계층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등 오히려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악평도 자주 들린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미국의 은행은 가계대출 후폭풍을 진정시키는데 앞장섰다. 담보대출 조정 프로그램을 실시해 일정 규모 이하의 대출자 상환 금액을 줄였고 금리를 크게 낮췄다. 대규모 장기연체 채권을 소각하고 유한책임대출(담보물 가치 이상의 미상환 채무는 상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통해 부실 리스크를 상쇄했다.

우리 은행에 이 정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미국의 경우와 한국의 실태는 다르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걱정한다. 그러나 은행의 게걸스러움에 비하면 약과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은행이 장기소액연체채권 정리와 한계차주, 다중연체자의 고통 경감 대책 마련에 앞장서도록 해야 한다. 은행 입장에서는 금융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은행은 더 이상 가계부채 리스크에서 제외되면 안 된다. 가계 빚 책임을 나눠 져야 ‘전당포’에서 ‘금융기관’으로 부활한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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