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진영] 아파트 후분양제의 역설

국민일보

[한마당-정진영] 아파트 후분양제의 역설

입력 2017-09-13 18:03
취재대행소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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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가계 빚 대책 발표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당초 8월로 예정됐으나 9월 중순에서 하순으로 늦춰지더니 다시 10월로 연기됐다. 정부의 고민은 아파트 시장 동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재 1400조원 정도인 가계 빚의 절반 정도는 아파트담보대출이고 이 중 상당수는 분양아파트의 중도금 집단대출이다. 가계 부채 문제는 집단대출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해법의 하나로 아파트 후분양이 더러 거론됐다. 후분양은 아파트가 80% 정도 지어졌을 때 입주자를 모집하고 분양하는 제도다. 당연히 사전비용인 집단대출이 필요 없다. 정부는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 등을 고쳐 1997년부터 시행하려 했으나 무산됐다. 근본적인 이유는 후분양에 따른 자금난을 호소한 건설사의 강력한 민원 때문이었다. 후분양을 하면 시공업체는 분양가의 70% 안팎인 계약금과 중도금을 자체 조달해야 한다. 지금은 건설사가 선분양·후분양을 자율 선택할 수 있으나 후분양을 하는 곳은 거의 없다.

부동산 시장의 흐름이 바뀌는 모양새다. 건설사가 먼저 후분양을 제안했다. 서울 강남의 재건축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업체들이 후분양을 조건으로 들고 나왔다. 10월 분양가 상한제를 앞두고 재건축조합이 원하는 수준의 분양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자 분양 시점을 미루려 하는 것이다. 후분양을 하면 분양시기 연기에 따른 땅값과 공사비 상승분을 떠안는 일반 분양 당첨자의 부담은 늘어나고 입주 때 내야 되는 조합원의 추가부담금은 그만큼 줄어든다.

선분양은 건설사에는 특혜 중의 특혜다. 지금까지 자기 돈 없이 땅에 말뚝만 꽂아둬도 수천억원 규모의 아파트를 지을 수 있었다. ‘8·2 부동산종합대책’의 약발이 세긴 센 것일까. 알토란같은 혜택을 건설사 스스로 마다하고 후분양을 언급하니 말이다.

글=정진영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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