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초조한 김정은?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초조한 김정은?

입력 2017-09-1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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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이렇게 미사일을 자주 쏜 적은 없었다. 문재인정부 들어 열 번을 쐈다. 화성 12형을 처음 발사한 5월 14일부터 일본 상공을 지나 3700㎞를 날아가게 한 9월 15일까지 열흘 남짓에 한 번꼴로 쏴댔다. 그 패턴은 발사시험을 넘어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고각발사여서 기술적 완성도를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오자 정각발사를 해보였다. ‘괌 포위사격’을 말한 뒤에는 괌까지 날아갈 만큼 비행거리를 늘려서 쐈고, ‘임의의 시각과 장소’를 언급하더니 평양 비행장에 이동식 발사대를 갖다 놓고 쐈다.

그렇게 열 번째 ‘미사일 쇼’를 벌인 뒤 김정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유엔의 제재 속에서 이루었지 유엔의 혜택에서 얻은 게 아니다. 저들의 무제한 제재·봉쇄 속에서도 핵무력 완성 목표를 어떻게 달성하는지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 종착점에 거의 다다른 만큼 전 국가적인 모든 힘을 다하여 끝장을 보아야 한다.” 상당히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외무성 등 다른 입을 빌려 비난하던 유엔 제재를 김정은이 직접 언급했고, “끝장을 봐야 한다”는 비장한 말도 그가 잘 사용하지 않던 표현이다.

전례 없이 빨라진 ‘도발시계’와 전례를 찾기 힘든 ‘도발언어’에서 나는 김정은이 뭔가 초조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치킨게임은 원래 극도의 불안감 속에 벌이는 대결 아닌가. 상대방이 먼저 핸들을 꺾지 않으면 나도 죽는다. 데드라인에 다가갈수록 고조되는 불안을 배짱으로 은폐하며 버티지만, 그래도 감춰지지 않는 초조함이 핸들 쥔 손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김정은도 치킨게임의 감정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일 수 있다. 왜 저리 서두르고, 왜 지금 저런 말을 하게 됐는지 가늠해보자면 ‘2018년 3월’이란 시점이 등장한다.

내년 3월이면 김정은이 할아버지의 ‘경제·국방 병진 노선’을 따라 ‘핵무력·경제건설 병진 노선’을 채택한 지 5주년이 된다. 핵무장과 경제번영을 함께 이룬다는 뜻인데, 지난 5년간 경제 성과는 평양에 신시가지 한두 곳 만든 것 외엔 없다. 핵은 완성 단계에 왔지만 그것이 촉발한 제재는 1∼3위 수출 품목을 다 차단했고 마침내 원유로 확대됐다. 김정은은 핵을 만들면 잘살 수 있다는 논리로 5년을 끌고 왔다. 핵 개발이 종착점에 다다랐다는 건 병진 노선의 성과를 보여줘야 할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한데, 결코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핵·경제 병진은 김정은 정권의 안위를 위협하는 두 가지 요소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핵을 통해 미국에 맞서고, 경제를 일으켜 인민의 반발을 무마해야 정권이 유지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중 하나인 핵을 쥐고도 초조해한다면 원인은 민생의 아우성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은 내년 3월까지 ‘성과’를 찾아 계속 서두를 가능성이 크다. 그가 만든 핵무기보다 이런 조바심이 더 걱정스럽다. 자칫하면 상황을 오판해 극단적 행동을 벌일 수 있는 위험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독일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남북 대화 채널의 상태는 심각했다. 남북연락사무소, 적십자연락사무소, 군 통신선 등 유선채널은 박근혜정부 시절 모두 차단됐다. 북한에 뭔가 말을 하려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 가서 핸드마이크로 소리쳐 전달하고, 북측이 이를 수첩에 받아 적어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 정 실장은 “군사적으로 하급 지휘선에서 오해가 발생하면 긴장이 갑자기 고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본적인 대화 채널조차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북한의 치킨게임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정 실장이 “2차 한국전쟁”이란 말까지 입에 담을 만큼 살얼음판이 돼 버렸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오판과 파국을 막는 일이다. 정부는 압박 수위를 높이며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법으로 ‘상황 관리’를 해 왔다. 그런 정부 안에서 난데없이 압박(송영무 국방장관)과 대화(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충돌했다.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태원준 온라인뉴스부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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