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적대적 공생관계를 향유하려는 자들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적대적 공생관계를 향유하려는 자들

입력 2017-09-26 17:58
취재대행소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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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의 원인을 ‘부부싸움’이라고 한 자유한국당 의원 정진석의 수준 이하 발언은 의도적이고 자극적이다. 자기가 모시던 또 다른 전직 대통령 때 벌어졌던 이상한 일들 때문에 수사가 시작되자 물타기하고, 우리 편에 단합하자는 신호를 보내는 것일 게다. 빌미는 서울시장 박원순이 준 측면이 있다. 그가 자신이 당했던 피해가 억울해 참지 못한다면 고소하고 법적 시비를 가리면 된다. 거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극적 결심을 하게 한 것 이상의 정치보복이 있었나”라고 자극한 것 역시 의도적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비중 있는 정치인이 공개 주장할 건 못된다. 내가 나서서 우리 편의 한을 풀어줄 테니 우리 편 모이자에 다름 아니다. 때는 정기국회고 곧 지방선거 국면으로 들어간다. 휘발성이 강한 정국에 적대감을 조성하기에 충분한 언급들이다.

서로 싫어하는 두 집단이 있다. 갈등과 증오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양측의 강경 세력은 입지가 강화된다. 아니 서로 강화시켜 주면서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게 더 적확한 설명이겠다. 증오에 찬 어조로 공격하면 기다렸다는 듯 더 센 목소리로 반격한다. 적대적 공생관계다. 냉전 시절 미·소와 남북이 그랬다. 두 진영의 소중한 자원은 미래보다 과거, 생산적이기보다 파괴적인 곳에 투입된다. 결국 양쪽 전체 진영의 고통과 손실만 가중시키는데 이익을 보는 몇몇 사람도 있다. 바로 양극단의 기득권 세력. 그러나 전체 이익에는 반한다. 그런 면에서 기득권 유지, 사적 이익 다지기에 딱 좋은 구도다. ‘극과 극은 통한다(Extremes meet).’ 이거 괜한 말 아니다.

이 구도로 몰고 가기 위해 선동 차원에서 자주 써먹는 게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이다. 상대방 입장을 약점 많은 것으로 슬쩍 바꿔 놓고 이를 집중 난타하는 것이다. 왜곡된 허상을 만들어 놓고 단번에 제압하려는 잔머리 전략이다. 이를테면 압도적인 대북 억지력을 확보·과시하자고 하면 ‘전쟁하자는 거냐’고 윽박지르거나, 대북 협상과 평화를 얘기하면 종북·좌빨로 낙인찍어 공격해대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정치에서 적폐청산과 정치보복이라는 프레임이 굳어져 가고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또다시 스멀스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이게 굳어지면 단기적으로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의 확산, 장기적으로는 공멸이다. 미군이 베트남전 때부터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한 부수적 피해라는 표현은 미군이 오폭이나 작전 실수로 살상한 민간인 피해를 말한다. 애써 감추려는 의도가 배어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불신과 분노 증폭 등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피해로 간다는 것쯤은 그 전략을 쓰는 그들도 다 안다. 눈앞의 이익으로 애써 모른 체하는 거다. 양쪽 기득권 세력이 재미 좀 보며 기득권 유지에는 기여하겠으나 장기적으로는 공동체가 파괴될 지경에 이른다.

그러니 적폐청산을 말하려면 긍정적 미래설계도 함께 말해야 진정성과 방향성이 생긴다. 완장 차고 밀어붙이다간 동티만 난다. 길지 않은 우리 현대가 말해준다. 국가정보원, 검찰, 국세청, 각 행정부처의 이른바 적폐청산 TF 활동과 전 정권 때의 일을 뒤집기만 하면서 5년을 보내서는 모두가 불행이다. 보수 진영은 정치보복 운운하려면 전비(前非)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받아봐야 한다. 전비의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정권 교체가 아니라 정권 붕괴를 당하고서도 성찰이 없지 않은가.

낡은 보수와 독선적 진보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재생해 그들만의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려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진영 안에서 또는 제3지대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세력이 힘을 얻어야 한다. 이런 건 역시 국민적 견제와 압력으로 이뤄질 수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극복돼야 한다. 합리적 상생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뉴 노멀이 돼서는 정말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