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는 '설전'으로 이뤄졌다

국민일보

기독교 역사는 '설전'으로 이뤄졌다

신학논쟁/로저 올슨 지음/박동식 옮김/새물결플러스

입력 2017-10-1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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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역사는 칼과 창의 전쟁뿐만 아니라 말과 글의 논쟁으로 이뤄졌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독교 사상의 여러 부류는 위대한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대결을 통해 살아남은 것들이다. 투쟁의 흔적은 역사적 인물들의 책과 편지 등으로 남았다. 현대인들은 전해져 오는 기록물을 통해 기독교가 사상의 대전(大戰) 위에 세워진 거대 구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신학논쟁’은 교회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을 불러내 TV 토론 프로그램을 보듯 생생한 설전(舌戰)을 재현한다. 저자 로저 올슨은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비판했던 2세기 비평가 켈수스로부터 시작해 죄와 타락의 문제를 둘러싼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격돌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16세기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당대 최고의 로마가톨릭 신학자였던 요한 에크가 한판 붙는가 하면, 논쟁적인 주제인 예정론과 자유의지를 놓고 16세기 장 칼뱅과 17세기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가 숙명적 대결을 벌인다. 칼뱅의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너선 에드워즈와 예정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요한 웨슬리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의 싸움을 이어간다. 20세기에 등장한 해방신학과 포스트모던신학 같은 현대 담론도 꼼꼼히 챙겼다.

가상의 대결을 따라가다 보면 한쪽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된다. 기계적 중립을 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입장을 최대한 충실히 담아낸 결과다. 저자는 누가 옳은지 선뜻 판단을 내려주지 않는다.

눈여겨볼 부분은 오늘날 정통과 이단으로 구분된 사상가들의 싸움이다. 펠라기우스는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교리에 반대했다. 불순종은 원죄가 아니라 주변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긴 사회적 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극렬히 반대했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펠라기우스는 교회를 대적한 이단자로만 보인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를 해친다고 판단했다. 전적 타락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이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낸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사람에게 있다고 봤다. 방종이 아니라 도덕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한쪽을 쉽게 비난하기 어렵게 만드는 대목이다.

17세기 도르트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은 아르미니우스와 교리적 대척점에 있었던 칼뱅의 설전은 흥미진진하다. 아르미니우스는 펠라기우스처럼 자유의지를 강조했고 구원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행과 하나님의 은총이 협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선한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까지는 주장하지 않아 그의 사상은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불린다.

흔한 오해와 달리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은 칼뱅과 상당 부분 겹친다. 아르미니우스는 전적 타락을 믿었다. 또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다.

두 사상가의 생각 차이는 악에 대한 이해에서 온다. 아르미니우스는 피조물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데서 악이 비롯됐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스스로를 어느 정도 제한했다고 말한다. 칼뱅 주장대로 하나님이 전적 주권으로 모든 것을 예정했다고 하면 죄와 악의 책임 또한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본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에게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근원이었다. 저자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의 대결을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 중 무엇을 강조할 것이냐의 문제로 정리한다.

책은 사상가들이 토론하거나 인터뷰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29개 장으로 구성됐다. 각 장은 각각의 사상을 간략히 파악할 수 있는 ‘배경’, 토론내용을 담은 ‘대화’, 간결한 이해를 돕는 ‘분석’, 추가 공부를 위한 ‘더 읽을 책’ 등 4개 코너로 짜여 있다. 사전 정보가 부족해도 편하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관심 주제부터 하나씩 골라 읽다 보면 어느새 기독교 사상사의 흐름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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