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하윤해] 쇼윈도 관계도 힘들어진 韓美

국민일보

[세상만사-하윤해] 쇼윈도 관계도 힘들어진 韓美

입력 2017-10-12 18:49

기사사진

한·미 관계가 불안하다. 특히 한·미 관계의 양 축인 안보와 통상이 한꺼번에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북핵 위기 해법을 놓고 이견이 노출되고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재협상 절차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안보와 통상의 ‘쌍끌이 갈등’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지금은 전쟁 걱정에, 경제 걱정까지 해야 하는 처지다.

그래서 한·미 관계가 문재인정부 들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목소리가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쏟아진다. 문재인정부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손발이 척척 맞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한·미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시기가 더 많았다.

한·미 정상의 ‘디커플링(비동조화)’은 많이 알려진 용어다. 디커플링은 서로 뜻이 맞는 ‘커플링’의 반대말로, 예를 들어 한국 대통령이 진보 성향이면, 미국 대통령이 보수 성향이라 엇박자가 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박정희-지미 카터’ 조합은 최악이었고, ‘노무현·김대중-조지 W 부시’ 사이도 만만치 않았다. 인권 변호사 출신의 문재인 대통령과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관계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미는 혈맹과 우방이라는 치장으로 갈등을 숨겨왔다. 이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의식한 제스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쇼윈도 관계’도 끝난 게 아니냐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본심을 숨긴 외교적 수사를 교환했던 양국 인사들이 요즘에는 속에 있는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초대 이승만정부 때부터 한·미 관계는 삐걱댔다. 미국은 한국 대통령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무모한 일들을 서슴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한국 대통령들은 미국이 이기적인 계산으로 남한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는 공포를 떨치지 못했다. 이 간극이 갈등을 잉태했다. 미국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이 ‘북진통일’ 주장을 행동으로 옮길까봐 우려했다. 1950년대 주한미군의 역할은 북한의 남침뿐만 아니라 남한의 북한 공격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이었다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지적했다. 윌리엄 포터 전 주한 미국 대사는 1960년대 미국 첩보기관이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었다고 폭로한 적도 있다.

한국 대통령의 불안함도 이해가 된다. 1970년 7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 7사단 철수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직후 박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시작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한반도가 전쟁 위기로 치달았던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미국은 1994년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준비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빌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해 막았다. 1976년 8월 북한이 판문점에서 아서 보니파스 대위 등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도끼만행사건’ 직후에도 전쟁의 공포감이 한반도를 휩쌌다.

미국은 경제적 이익에 냉정하다. 한국 사정은 변수가 아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정권에 미국은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정권이 빈사상태에 빠졌을 때도 미국은 농산물 개방 압력을 가했다.

2017년 가을 한반도 상황은 과거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엄중하다. 북한이 250㏏ 기준 핵무기 한 발을 서울로 쏠 경우 사망자가 78만명에 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한·미 FTA 재협상으로 한국의 대미 수출이 타격받을 가능성이 크다.

국내 정치에서 협치는 선택일 수 있지만, 외교안보 이슈에서 협치는 의무이자 필수다. 문재인정부는 ‘외교안보 라인’ 교체 요구를 전향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야당은 정략적 욕심으로 한·미 정부의 이견을 과장하는 행동을 삼가야 할 것이다. 한·미 갈등의 사례를 보면 양국 모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한·미 양국에 필요한 것은 역지사지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