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한승주] ‘궁궐의 도시’ 서울에 사는 행복

국민일보

[돋을새김-한승주] ‘궁궐의 도시’ 서울에 사는 행복

입력 2017-10-16 17:27

기사사진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며 45년 넘게 여기서 살았다. 고궁을 좋아해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을 종종 찾는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못 가본 곳이 있다. 바로 종묘다. 얼마 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을 읽으며 나는 적잖게 당황했다. 서울이 고향인 저자가 자랑과 사랑으로 쓴 서울이야기. 그 첫 장이 종묘였기 때문이다. 책표지도 한 폭의 거대한 수묵 진경산수화 같은 종묘 정전의 사진.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을 하얗게 덮은 모습이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다.

종묘 정전은 언뜻 보면 단조롭다. 조선시대 임금이 머물던 궁궐들에 비해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기와지붕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긴, 동서 길이가 100m를 넘는 장엄한 자태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런 종묘의 건축미를 알아본 서양인이 있으니 유명 건축가 프랭크 게리다. 종묘는 안 가봤어도 게리는 알았던 나는 10년 전 미국 연수 시절, 그의 건축물을 보러 다니곤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스테인리스스틸과 티타늄 재질도 특이했고 아무렇게나 잘라놓은 것 같은 철판이 이어져 유려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내가 게리의 건축물에 감탄하고 있을 때 그는 거꾸로 종묘를 찾아왔다. 1997년 한국 방문 때 종묘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그는 가족에게 이곳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2012년 건축가인 아들 등과 함께 서울에 온 그가 자신을 초청한 재단에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종묘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당시 그는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며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종묘가 우리나라 건물 중 가장 먼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책에 소개된 또 하나의 인상적인 공간은 창덕궁 존덕정이다. 창덕궁, 특히 후원은 서울에서 가장 멋진 곳 중 하나다. 꽤 여러 번 창덕궁에 갔는데 아쉽게도 존덕정에 대한 기억은 없다. 이 책의 부제는 ‘만천명월(萬川明月) 주인옹은 말한다’인데, 이 장문의 글이 존덕정에 새겨져 있다. 조선 정조가 쓴 글로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정조는 탁월한 문장가였다. 이 글은 정조가 인간 심성을 섬세하게 파악해 각자 생김새대로 대하는 이치를 피력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중략) 모난 자는 둥글게 원만한 자는 모나게 대하고, 활달한 자에게는 나의 깊이 있는 면을 보여주고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면을 보여준다.”

궁궐에 가면 그 시대가 보인다. 역사는 교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현장에서 건물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 사람들이 궁금한 것은 구조보다는 그 안에서 인물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서문에 있듯 역사도시로서 서울의 품위와 권위는 조선왕조 5대 궁궐에서 나온다. 서울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이 궁궐이다. 궁궐과 스토리텔링이 만나면 훨씬 매력적인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조선시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문루에는 종과 북이 걸려 있어 매일 정오마다 종소리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저자는 이 종소리와 북소리를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궁궐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게 개발하고 사람들이 모여들 행사를 잘 기획하면 서울은 외국인들이 좀 더 찾고 싶은 도시가 될 것이다.

하늘이 높아지는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던가. 올가을에는 서울을 걸어봐야겠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서울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둘러봐야겠다. 봄꽃이 피어나는 경복궁, 비 오는 여름날 창경궁, 낙엽이 쌓인 늦가을의 창덕궁, 눈 내린 겨울아침 종묘를 찾아야겠다. 그게 미처 몰랐던 궁궐의 도시 서울에 사는 행복일 것이다.

한승주 문화부장 sjhan@kmib.co.kr

많이 본 기사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