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잔치와 하나님 나라

국민일보

[바이블시론-채수일] 잔치와 하나님 나라

입력 2017-10-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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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월은 유난히 추석 연휴가 길었고, 이런저런 축제도 많았습니다. 추석 연휴를 의미 있게 활용한 사람도 많았지만, 어떻게 지내야 할지 당혹스러운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잠시도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놀 줄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1년 중 거의 삼분의 일은 일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전례와 축제, 순례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안식일도 하나님이 일하신 후에 쉬셨다는 이야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에서 구원은 잔치와 축제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억을 ‘유월절 축제’로 전승했습니다. 그들에게 잔치와 축제는 그들의 역사적 해방 경험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장막절, 오순절 등 농경사회의 오래된 전통과 관계된 축제들도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겪은 역사적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상생활과 구원에 대한 표상이 기쁨과 환희와 희열과 희망으로 가득 찬 놀이와 잔치, 축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뭇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민족의 가장 뿌리 깊은 모순 중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잔치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특별히 혼인잔치 비유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관계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과 서, 남과 북에서 초대받습니다.”(눅 13: 29) “친구와 형제,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도 초대됐습니다(눅 14: 12∼14).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가지로 비유할 수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잔치에 비유했을까요. 그것은 잔치의 본질적 특성인 음주가무의 즐거움, 개방성, 일상으로부터의 단절과 초월,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겨자씨와 나무, 누룩과 빵 등의 비유), 현실의 전복(顚覆), 창발성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앞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생로병사라는 인생의 주기를 매듭짓는 잔치나 제의이건, 농경사회의 세시풍습이건, 종교적·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과 반복적 재현이건 잔치와 축제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적인 생활로부터의 탈출, 익숙하고 관습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문학비평가 바흐친은 말했습니다. “축제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교회와 시장, 귀족과 천민,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 그 모든 경계를 발랄하고 황홀하고 사치스럽게 흐트러뜨리는 혼란 그 자체였다.” 그렇습니다. 잔치와 축제는 ‘경계 타파적’입니다. 일상과 초월, 신분과 계급, 엄숙함과 재미 사이의 경계를 타파합니다. 유럽 중세의 ‘바보제’가 그랬고, 우리나라의 탈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근대 이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은 주변부로 밀려났고 오직 ‘일하는 인간(Homo labor)’, 나아가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만이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로봇이 대부분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일’은 여전히 사람의 가치를 규정할 것입니다. 물론 그에 상응하여 놀이의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의 잔치와 놀이는 이미 공동체성, 경계 초월성, 현실 전복적 성격을 상실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그들만의 잔치’가 되었거나, 회식과 컴퓨터 게임과 스포츠로 상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 후 함께 나누는 공동식사에서부터 성만찬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의 크고 작은 잔치와 축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맛보는 자리입니다. 교회가 지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인지 아닌지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잔치가 ‘그들만의 잔치’인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지’에 따라서 판단될 것입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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