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적폐청산과 청산적폐

국민일보

[여의도포럼-김일수] 적폐청산과 청산적폐

입력 2017-11-13 17:32 수정 2017-11-1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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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초기에 내걸었던 국정 최우선 과제가 적폐청산이었다. 이 표제는 현재 진행형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당분간 뉴스의 초점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탄핵절차를 통해 물러난 전 정권의 몰락을 딛고 일어선 새 정권이기에 과거 권력과의 도덕적 차별을 선명히 할 필요성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폐청산이란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지금까지의 상황은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한 현상이다. 그리 요란하진 않았지만 단호했던 문민정부의 과거청산, 금융실명제, 군내 사조직 혁파 등이 뇌리에 겹치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히려 그보다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의 음습한 분위기는 우리 헌정사에 자주 등장하곤 했던 혁명정부의 부패척결과 서정쇄신의 데자뷔 같은 느낌을 준다. 촛불광장과 촛불혁명의 공론화가 우선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충분히 일조를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청와대의 사이버청원광장에 하루에 수만명씩 몰려들어 아우성을 치면 낙태의 자유화도 국정의제가 되고, 무죄추정의 원칙도 짓밟고 아무나 무차별 몹쓸 죄인처럼 매도당하고, 만기출소를 앞둔 어느 아동성범죄자의 인권도 박탈될 위기에 처하는 게 지금 거기에서 벌어지는 불길한 현실이다. 촛불혁명의 굶주린 혼이 시민의 일상적인 삶 가까이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며 공포를 조성하는 그런 분위기가 어디로 옮겨붙을는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적폐청산이 이렇게 정체 불명한 다중의 힘을 동원하거나 그에 추동되어 끌려가기 시작한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치놀음이 될까 심히 두렵다.

문득 중국 문화혁명 시기에 홍위병을 떠올리는 건 과민일까. 만일 제도가 문제 있다면 제도를 혁신해야 할 것이고, 정책의 실패였다면 그 실패를 반면교사 삼고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여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현자의 정치는 현실로 드러난 적폐를 결코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적폐요 내 의식의 적폐였다는 반성적 이성에서 출발하는 게 바른 길이다. 그렇지 않고 몇몇 공격대상을 골라 주머니 먼지까지 샅샅이 뒤지고, 그들의 싹을 자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행태는 패권정치에 다름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 결과는 사회통합적인 힘의 약화이거나 국력의 쇠퇴거나 적폐 위에 적폐의 악순환이라는 후유증만 남길 개연성이 매우 크다.

거기에서 국민의 안위와 문화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치는 실패할 수 있고, 경제도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고, 사회가 일탈하고, 문화도 일시 타락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세계의 영역에서 이성과 정신의 발전은 결코 뒷걸음질쳐서는 안 되며, 과거로 회귀해서도 안 된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번득이는 칼날 밑에서 일시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순간의 후퇴는 벌어질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오래도록 역사의 수레바퀴를 계속 뒷걸음질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심은 흐르는 물과 같아 떠나가기 쉬우며,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민심도 도가 넘는 것을 보면 돌아서기 마련이다. 최근 20년간 우리 손으로 이룬 정권교체 현상이 그 방증이다.

문제는 어떻게 적폐청산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분노와 증오의 굿판을 포용과 화합의 어울림으로, 부정과 파괴의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촛불광장을 긍정과 사랑의 춤판으로, 그리고 한풀이의 모닥불을 소망의 횃불로 변환시킬 수 있느냐이다.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라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설 자리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이 새로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국력의 공고화와 국민적 대동단결 그리고 사회통합에 좌우를 가리지 않고 지혜를 끌어 모으는 데 총력을 기울여도 오히려 부족함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편 가르기 정치와 진실이 배어있지 않은 감성의 정치는 베짱이 한철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항시 염두에 두길 바란다.

적폐청산 같은 정치적 거대담론을 또다시 정치검찰의 칼을 빌려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 열매가 처음에는 무척 달콤한 것 같아도 얼마나 씁쓸한 것인가는 이미 이 정권에서 저 정권으로 바뀔 때마다 항상 보아 왔듯 속이 훤히 보이는 구태가 아닌가. 절제를 모르고 과거를 송두리째 뒤엎으려는 적폐청산의 과욕은 그 자체가 새로운 적폐가 될 것이다. 그 적폐는 다시 쌓여 할 일 많은 미래권력과 미래사회가 치워야 할 짐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

반려인 연구소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