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IMF 20년’에도 환란白書는 없고

국민일보

[조용래 칼럼] ‘IMF 20년’에도 환란白書는 없고

입력 2017-11-19 17:52
  • 국민일보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기사사진

1997년 11월 19일, 임기를 겨우 석 달 남짓 남겨놓은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부총리를 바꾼다. 그날 오전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금융개혁법안의 국회통과 무산에 따른 후속조치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강경식의 환란일기’(1999)에 따르면 당시 김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데’라고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그보다 앞선 14일, 김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보고를 받고 IMF와 협의를 개시하도록 지시한다. 그해 7월부터 태국을 시작으로 번지던 아시아 외환위기의 소용돌이에 한국도 떠밀려가고 있음을 정부가 시인한 것이다. 부총리 교체는 국민들의 동요를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카드였던 것 같다.

하나 정작 후임으로 임명된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19일 저녁 기자회견에서 IMF 구제금융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김 대통령의 쇄신책은 빛을 보지 못했고 시간만 흘렀다. 마침내 21일 밤 임 부총리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촌각이 아쉬운 상황에서 이 이틀의 공백은 또 뭔지 모르겠다.

20년 전 환란(換亂, 1997년 외환위기)으로 치닫던 1주일간의 흐름을 간단하게 짚어봤다. 그런데 의문이 꼬리를 문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의 인사다. 경제주권이 넘어가는 상황을 고작 책임자 교체 정도로 넘어가려고 했을까. 구제금융의 의미를 몰랐던 건가. 임 부총리는 왜 IMF행을 미뤘을까. 그의 고집인가, 임명권자의 의중인가.

어떻든 정부는 그해 12월 3일 IMF의 구제금융에 공식 합의했고 이로써 IMF가 요청하는 조건을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IMF 관리체제가 시작됐다. 한국경제는 그렇듯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 참담한 사태에 대한 정부의 공식 기록, 분석 등이 전혀 없다.

그 사태를 지칭하는 공식명칭도 없다. ‘IMF’는 아픈 기억의 상징어가 됐지만, 사실 ‘IMF 사태’ ‘IMF 외환위기’ 등 IMF를 앞세우는 지칭은 상황을 적잖이 왜곡하는 것이다. IMF는 어찌됐든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도움의 손길이었는데 마치 위기를 떠안긴 장본인처럼 들린다. 교묘한 책임 떠넘기기다.

환란과 관련한 정부의 공식기록은 ‘공적자금관리백서’뿐이다. 공적자금관리백서는 환란 이후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에 대한 운용현황 등을 담은 것인데 2000년 이후 해마다 나온다. 다만 이 백서는 공적자금에 대해서만 거론하기에 환란의 원인, 경과, 사후 관리 및 평가 등과는 거리가 멀다.

‘1998년 경제백서’가 주로 환란에 대해 거론하고는 있지만 총체적이고 본격적인 것은 못 된다. 실제로 환란의 원인은 매우 다양할 터다. 당연히 김영삼 대통령의 리더십도 꼽힐 것이다. 또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 미흡한 정책대응, 그해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대립, 재벌의 방만경영, 경제학자를 포함한 전문가그룹의 판단 미스, 언론의 감시기능 부재, 시민단체의 편들기, 노동계를 비롯한 각종 이익집단의 반발 등 수많은 요인들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아무튼 20년이 지나도록 이 사태에 대해 한국정부는 침묵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환란 직전 경제적 기초는 튼튼하다며 큰 소리를 쳤던 경제관료나 관변학자들 중 자기반성을 내놓은 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민일보를 비롯한 언론도 마찬가지다. 환란의 한 원인으로 부각되는 기아자동차의 부도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 그리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밑도 끝도 없는 부도처리 반대론을 펴 사태를 더욱 꼬이게 했다. 부실 때문에 망해가는 회사를 국민기업 운운하는 프레임을 짜고 그에 동조하는 주장을 폈던 이들, 마찬가지로 그들의 반성과 고백은 아직까지 나온 바 없다.

당시 고위 경제관료들의 회고집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컨대 ‘강경식의 환란일기’는 환란의 주범으로 내몰린 데 대한 반박성 기록에 가깝다. 또 IMF와의 협상에서 정부대표였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의 ‘외환위기 징비록’(2008), 환란 직후 김대중정부의 경제수장을 맡은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의 ‘한국의 외환위기’(2006) 등은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반성 없는 사회는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난 20년이 더욱 부끄러워지는 이유다. 2001년 8월 김대중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3년이나 앞당겨 갚았다고 자랑했지만 사태의 원인분석과 반성은 없었다. 이제라도 국가 차원에서 환란의 원인과 과정을 따져서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옳다. 당장 환란백서부터 만들어야 한다.

지금 환란 재발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습으로 제2, 제3의 국가적 위기상황은 언제든지 밀려들 수 있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반려인 연구소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