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칼럼] 대통령 신년사와 적폐청산

국민일보

[정진영 칼럼] 대통령 신년사와 적폐청산

입력 2018-01-02 18:28
  • 국민일보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기사사진

새해가 되면 대체로 새 각오를 다진다. 살빼기, 금연금주, 운동, 외국어 공부, 여행, 책읽기, 재테크, 가족과 함께 시간보내기, 효도 같은 소소한 것에서부터 회사에서의 약진, 기부금 증액, 봉사활동 배가, 신앙생활 주력, 퇴직 후 인생 모색 등으로 폭을 넓히며 마음을 다잡는다. 최근 취업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성인 24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84.2%가 매년 반복되는 새해 계획이 있으며, 26.9%는 한 달 이내 그 다짐이 무위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지키면 대박, 안 지켜도 그만인 게 각자가 신년에 품는 포부다.

공적 영역은 다르다. 새해를 맞는 각 기관의 철학이 신년사로 공표되고 정책으로 뒷받침 된다. 국민 앞에 내놓는 확약이자 공증이기 때문에 무게감이 실린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 핵심은 ‘적폐청산’과 ‘삶의 질 개선’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적폐청산 의지를 밝힌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이라며 적폐와의 싸움을 계속할 뜻임을 분명히 했다. 다소 의외였다. 신년사는 어제의 반추가 아니라 내일의 비전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다. 피로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슬슬 새어나오는 마당에 쌓인 폐단의 처리 문제를 강조한 것은 일견 퇴행적이다. 현정(顯正)을 말하라는데 파사(破邪)에 방점을 찍는 것에 대해 야권을 중심으로 비난이 일고 있다.

청산과 보복의 경계를 따지는 적폐 논란은 우선 여론의 향배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된다. 국민일보가 지난해 12월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을 통해 실시한 창간29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0.3%가 ‘(적폐)의혹을 철저히 밝혀 불법이 있다면 처벌해야 한다’고 답했다. ‘정치보복’이라는 대답은 25.9%에 그쳤다. 동아일보, KBS, mbc, 서울신문, CBS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적폐를 단죄해야 한다는 응답이 훨씬 높았다. 결과의 합목적성은 차치하더라도 여론이 다수라는 것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유의미한 맥락이 있다는 뜻이다. 적폐에 대한 인식은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수용 태도가 달라진다. 청산에 무게를 싣는 측에서 보면 이는 역사바로세우기다. 일제 해방직후부터 지금까지 적폐를 둘러싼 갈등은 되풀이됐다. 8·15, 4·19, 5·16, 5·18, 6·10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변곡점이 있었음에도 적폐가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자기복제를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화됐다. 1960년 4·19 혁명이후 장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한국전쟁 10주년 행사에서 “국내 모든 적폐를 과감하게 일소하고…”라고 밝혔다. 60년 가까이 지난 그 때도 적폐는 현안이었다.

적폐의 마무리는 진정성 있는 사과를 기반으로 완결된다. 박근혜·이명박 정부에 있었던 어느 누구도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지 않는다. 발톱을 세우며 몸을 피하기만 한다. 이들의 논리는 진부하다. “잘못한 걸 처벌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정치보복임이 분명하지 않나. 다 까발리자. 당신들은 괜찮을 것 같으냐”는 것이다. 어불성설이고 적반하장이다. 보복은 박근혜·이명박 정부 때처럼 전 정권 관계자의 뇌물수수 등 개인 비리를 단죄하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불법정치 개입, 블랙리스트 작성 등 정권 차원의 조직적 범죄를 수사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문재인정부 적폐 처리 과정의 한계는 주요 대상이 제외돼 있다는 점이다. 귀족노조에 관한한 이전 정권의 묵은 해악 못지않게 손봐야 될 사안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우리 경제를 망치는 주범이 오른쪽에는 재벌, 왼쪽에는 귀족노조가 있다고 했다. 왜곡된 노사관계, 일그러진 고용시장 등 노동계 현안의 다수가 귀족노조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은 친노조 정권이라 자임하는 현 정부가 최적임이다. 지금까지 핏대를 세워 떡을 얻는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그 떡을 나누는 환경이 도래했음을 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적폐처리를 제도화하는 노력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법률적 정비를 위해서는 야당과의 소통에 더 진력해야 한다. 적폐의 정당성과 당위성에 취해있어서는 안 된다. 큰 힘에는 반드시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경구를 경고로 새겨들어야 한다.

지난 1일 아침 동네목욕탕에 갔다. 뜨끈한 탕 안에서 올 한 해를 어떻게 맞을까 생각했다. 지적보다는 격려, 비판보다는 칭찬을 앞세우는 게 장년의 내게 어울리는 최고의 덕목이라 여겼다. 새해 첫 출근, 어느 새 또 꾸짖는 글을 썼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반려인 연구소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