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전도사, 의열단원으로 일어서다… “포로된 자 해방시켜 주시는 이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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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전도사, 의열단원으로 일어서다… “포로된 자 해방시켜 주시는 이가 예수”

전도사 박문희와 부산 동래복음전도관

입력 2018-01-0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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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희 (1901∼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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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 박문희 전도사가 살던 부산 칠산동 생가. 정식 명칭은 그의 누이 이름을 딴 ‘박차정 의사 생가’다. 박차정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박차정은 두 오빠와 함께 의열단원으로 일제와 싸웠다. 박 전도사의 장남 박의영 목사(오른쪽)가 사적지에서 근무하는 관계자와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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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중국 충칭에서 김원봉 박차정 부부(가운데)가 반전동맹 소속 일본인들과 찍은 사진. 부부는 박문희를 의열단 국내 비선으로 삼는다. 조선총독부 재판기록. 젊은 시절 박문희(사진 위부터 시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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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여고 옆 박차정 동상(왼쪽 사진). ‘박문희 생가’를 둘러보는 아들 박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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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희가 졸업한 동래고(옛 동래고보·왼쪽 사진). 서울 독립문교회(현 한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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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6월 12일 오후 2시 부산법원 제2호 법정.

‘동래읍에서 사회운동을 맹렬히 진행하던 박문희는 중국 난징(南京)에 있는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소개됐다. 중국 국민당정부 주석 장개석의 군사훈련생을 조선 내지에서 모집하라는 부탁을 받고 조선에 돌아와 동래 노조간부 4, 5명을 소개하야 난징으로 가게 해 훈련을 받게 했다는 혐의로 경남경찰부에 피검되어 부산법원 예심을 거쳐 지난 12일 오후 2시에 부산법원 제2호 법정에서 등본(藤本) 재판장 주심과 원교검사입회와 박우윤 변호사 열석으로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피고의 주소씨명을 간단하게 물은 뒤 재판장이 치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다고 공개를 금지한다 선언해, 동래에서 40∼50명 친지들이 일부러 방청하러 왔다가 법정 밖으로 몰려 나갔다고 한다. 부산법원이 방청을 금지하기는 근래에 드문 일이라는데 지난번 재판장이 경질되면서부터 다소 방침이 변한 모양이라 한다.’

당시 신문보도 내용이다. 흡사 1980년대 시국을 다뤘던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역사는 이렇게 느리게 전진하나 하나님의 공의는 끝내 승리한다는 것이 성서적 세계관이다.

신문은 박문희를 ‘사회운동을 맹렬히’ 한 인물로 보도하고 있다. 일제가 언론에 재갈을 물린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맹렬히’라고 직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록을 남긴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동래복음전도관의 영향

의열단원 박문희.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념성을 이유로 지금껏 공식 독립운동가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의 여동생 박차정(1910∼1943)은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5년 8월 15일 어렵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을 수 있었다. 박차정의 남편은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은밀한 작전을 지시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1898∼1958)이다.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 박문희를 비롯한 박씨 가문 후손에게 ‘주홍글씨’가 박힌 이유다.

당시 신문은 그해 공판에서 박문희에게 징역 2년이 언도됐다는 내용을 꾸준히 보도하고 있다.

박문희는 대한제국 탁지부 측량기사 박상렬의 3남2녀 중 장남이다. 어머니 김맹련은 동래 명문가 규수로 그의 사촌이 한글학자이자 북한 정치가였던 김두봉(1889∼1960)이었다.

박상렬은 ‘근대적 측량’ 행위를 일제의 척식으로 느끼는 백성의 따가운 눈초리에 측량기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1918년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을 비관하는 유서를 남기고 부산 다대포 바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무렵 명문 동래고보를 졸업한 박문희는 아버지의 자살로 큰 충격에 빠졌다. 청년 박문희의 삶 근간을 흔드는 죽음과의 직면이었다. 그는 동네 동래복음전도관(부산 온천중앙성결교회 전신)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

박문희는 전도관 형제들의 권유에 따라 1919년 봄 서울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에 진학한다. 경북 달성군(현 대구 달성) 현풍 출신 이상철(독립운동가)이 동기였다. 그들은 그해 만세운동에 나섰다. 박문희는 재학과 졸업 무렵 경기도 안성교회, 경남 통영교회, 서울 독립문교회 등에서 전도사 생활을 한다. 당시 성결교는 조직교회 위주가 아닌 집회 전도 중심이었다. 따라서 노방전도에 정열을 쏟았다.

그리고 1924년 6월 대구 미션스쿨 신명여학교 출신 이도령과 결혼한다. 이도령은 현풍면 유지였던 신앙인 이상윤의 딸이었다. 이상윤은 훗날 목회를 그만두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위 박문희가 안타까워 일본 대학 경제학과로 유학도 보내보고, 강제 이혼(훗날 재결합)도 시켜보나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한편 장녀 영숙(작고)은 행촌동 독립문교회(현 서울 도곡동 한우리교회) 사택에서 태어났다.

1925년 전도사를 사임한 박문희는 고향 동래에 내려가 사회단체 경남청년연맹을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선다. 의병장 출신 구연영이 전도사가 돼 구국하고자 했던 것과 반대되는 사례다. 청년기 신학공부를 접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과 비슷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문희는 1929년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돼 김병로(1887∼1964·독립운동가) 신간회 회장을 보좌한다. 그러다 1930년 2월 광주학생의거 격문사건으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된다.

출옥 후 박문희는 포로 된 자를 해방시켜 주시는 이가 예수임을 믿고 무력투쟁을 강화한다. 특히 누이 차정이 부산진 일신여학교 재학 시절부터 동맹휴학 등으로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자 그를 제물포항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시킨다. 차정에 앞서 남동생 문호(1907∼1934)가 먼저 망명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김원봉과 결혼한 차정은 박문희를 국내 비선 의열단원으로 입단시킨다. 박문희는 중국에서 김원봉을 만나 독립자금을 받아 귀국하기도 한다. 그 자금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 5명을 선발해 중국으로 보냈고, 이것이 발각돼 1934년 1월 체포된다.

이들 형제 중 문호는 일본과 서울 형무소 수감 끝에 고문 후유증으로, 차정은 일군과의 총격전 끝에 부상해 사망했다. 박문희는 1950년 6월 실종됐다.

‘전도사 박문희’, 아들이 이어받아

지난 2일 부산 박의영 은퇴목사(72·부산 가나안교회 목사·경성대 교목 역임) 자택. 박 목사가 아버지 박문희의 젊은 시절 사진을 앞에 놓고 그의 삶을 얘기했다. 6·25전쟁이 났던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그가 아버지의 못다 이룬 목회의 꿈을 이뤘다. 박 목사는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을 두고 “하나님의 축복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문희 박문호 박차정은 한국교회가 기억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초기 개신교 영향 아래 공부했다. 박문희의 경우 신학교에 가고 전도사가 됐지만, 기독교 역사신학자 누구도 그들을 연구하지 않았다. 도리어 고 김재승(한국해양대) 조동걸(국민대), 신용하(서울대 명예) 이송희(신라대) 교수 등 일반 역사학자들이 학술적 접근을 했다. 때문에 ‘기독교 독립운동가’ 부분이 심층적으로 다뤄진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그 형제들에 대해 유족이 나설 수 없었어요. 그건 신학자와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봤어요. 또 ‘연좌제’가 작용해 자료조차 없애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주1회 사찰이 이뤄졌어요. 목회자가 돼서도 중앙정보부나 경찰의 감시가 있었으니까요.”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 형제가 김원봉 김두봉 등과 함께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1950년 6월 서울서 부산 집으로 피란오던 아버지가 실종됐는데 이를 월북으로 본 것이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좌우합작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의 민족주의 계열이었고 그중에서도 이상재 선생 등과 같이 기독교 민족주의자였죠. 신간회를 기독교 민족주의자 계열이 장악하자 좌익계열이 분통해 하잖아요.”

박문희는 1997년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실종 심판확정을 받았다. “아버지가 월북했다면 당시 북한 권력 실세 김원봉 김두봉이 있었는데 북한에서 그 흔적조차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박 목사의 얘기다.

박문희의 부인은 1965년, 어머니는 1970년 사망했다. 두 여인은 죽는 날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도 문을 열어 놓고 대문을 응시했다. 남편이, 아들이 들어설까 싶어서다. 그리고 두 여인이 말했다. “너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치하지 마라. 집안 망한다.” 그것은 곧 독립운동으로 3대가 망함을 의미했다.

“우리 집안은 그래도 하나님 축복을 받았습니다. 막내 삼촌 박문하(1918∼1976·의사 및 수필가)가 당신 형제와 우리 형제를 돌봐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다른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에 비하면 행복한 삶이었죠. 부끄러운 비교지만 말입니다.”

‘독립운동 트라우마’는 박의영의 형제들이 약사(신자·누나·작고)와 의사(의정·형·작고)의 길을 걷게 했다. 그리고 3대째인 박의영 목사의 외동아들은 아프리카에 나가 있는 당당한 대한민국 외교관이다.

“아버지의 생가는 ‘박차정 의사 생가’ 이름으로 동래고 앞에 복원됐습니다. 박차정 동상도 동래여고(옛 부산진 일신여학교) 옆에 있고요. ‘빨갱이’ 마녀사냥 속에 살았던 우리 형제는 아버지 사진 등 기록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했어요. 생가도 역사학자 신용하 조동걸 교수님이 알려주셨죠.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 교수께서 ‘당신이 그 훌륭한 분의 자제인가. 동래고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우물 있는 집이 있네. 그게 박문희 선생 생가일세’라고 알려줬어요.”

박의영 목사는 젊은 시절 마산결핵요양소에서 투병했고, 그곳에 훗날 교회를 세웠다. 통영 앞 사량도에서 무의탁 결핵환자 돌봄센터도 운영했다. 지금은 창원시 마산에서 사모가 돌봄센터를 운영한다. 고난 속에 살아온 그는 현재 혈액암 투병 중이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다 살면 잘했다 칭찬받고 천국 갈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공의를 외치다 고통당한 많은 분들이 이제는 결박에서 풀려났으면 좋겠습니다.”

<연보>

1919년 서울 경성성서학원 입학

1922∼24년 안성교회 통영교회 독립문교회 시무

1925년 경남청년연맹 창립 주도

1927년 일본대학 경제과 유학

1929년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 피선

1930년 광주학생의거 격문사건으로 수감 및 누이 박차정 망명시킴

1931년 박차정,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

1932년 중국서 의열단 가입. 공작금 받아 귀국 후 의열단원 포섭

1934년 조선혁명간부학교 파송 배후로 체포

1936년 만기 출옥

1945∼49년 정당활동 및 부산 대중일보 사장

1950년 6월 서울에서 동래로 피란 중 행방불명

부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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