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2> 정승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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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2> 정승식 장로

베트남 전장에서… 지하 1000m 막장에서… 주님 함께하셔 “천하의 술보 승식이가 복음에 미쳤다”

입력 2018-01-13 00:00 수정 2018-01-1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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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식 장로(오른쪽)가 1975년 독일 아헨 광산의 기숙사에서 동료와 함께 김치를 담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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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크리스마스 때 루프트한자 직원들과의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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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둘째아들 결혼식에서 포즈를 취했다. 맨 왼쪽이 정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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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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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베트남전 참전을 위해 부산항 제3부두를 떠날 때만 해도 정승식(70) 장로는 생사의 기로를 몰랐다. 백마부대 총탄의 불빛 속에서 살아남은 그는 1974년 다시 삶의 행로를 이국땅 독일로 틀었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15세까지 산꼭대기에서 화전민으로 살았다. 가난한 집안을 살리기 위해 파독 광부를 택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어쩌면 삶의 절규에 가까웠다. 막상 독일로 왔지만 광부생활은 피눈물 나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던 베트남을 회상했고, 극심한 가난 속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위로했다. 지하 1000m 막장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면 새까맣게 타들어간 가슴을 술로 풀었다.

하지만 3년의 계약기간 후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고국은 여전히 가난했고, 배우지 못한 탓에 한국 땅에 설 자리가 없었다. 독일에 남는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결혼과 직장.

그때부터 한인 간호사와 결혼하기 위해 병원 기숙사 등을 찾아다녔다.

정 장로가 파독 간호사인 아내 박춘자 권사를 만나 결혼한 것은 77년 3월이었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늘 격한 논쟁이 이어졌고 가정은 피폐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교회를 간다고 하는 거예요. 뭐 잘됐다 싶었죠. 일요일에 잔소리 듣지 않고 맘껏 술 먹을 수 있으니까요.”

‘잠깐 한 주만 가겠지’ 생각했던 아내는 매 주일 어김없이 교회에 갔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목사님이 심방오시니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아내의 말에 버럭 화를 냈고 외출해 오후 늦게야 들어왔다. 이후로도 교회 문제로 아내와 다투는 일이 잦았다.

78년 12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자”는 아내의 유혹(?)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바로 교회였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는 마태복음 13장 36∼43절. 천국과 지옥에 대한 부분이었다. 난생처음 교회에 갔고, 처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목사님 말씀을 듣다 보니 지금껏 힘들게 살고 고생만 하다 지옥에 가는 게 너무 억울했어요. 일단 인류를 구했다는 예수란 사람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며칠 뒤 또다시 설교 말씀이 강하게 다가왔다. 창세기 12장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이었다. 마치 베트남전 때 상관의 명령처럼 단호했다. 무속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 집안의 장남으로, 부적을 지니고 다니던 자신의 어린시절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술로 인생을 허망하게 보낸 아버지의 모습도 얼핏 스쳤다. 아버지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술이 힘이고 용기이자 친구였다. 다음 날부터 술을 딱 끊었다. 여느 때처럼 주일날 친구들이 술병을 들고 찾아오면 술병을 치우고 밥을 맛있게 대접한 다음 교회로 데리고 갔다.

친구들은 “천하의 술보 승식이가 미쳤다”고 혀를 내둘렀다. 주일은 물론, 화요일과 금요일의 성경공부에 참여했고 새벽 2시까지 철야기도에 매달렸다. 폭포수 같은 주님의 은혜가 임했다. 그러자 가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자존심 강하고 완고했던 그는 주님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었다.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1979년 독일 터빈회사 자재과에서 근무할 때였다. 독일인 동료 디터(Diter)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정 장로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그날도 “도대체 너는 언제 너의 나라에 갈 거냐”고 비아냥거렸다. 그때 정 장로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독일에 머무르게 하셔서 있는 것”이라며 “인간은 죽고, 죽음 후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독일인 동료는 자신은 퇴직 후 세계를 여행하며 인생을 즐길 거라고 비웃었다.

이튿날이었다. 회사 분위기가 이상해 물었더니, 전날 늦은 밤에 디터가 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날 정 장로는 인간의 유한함을 통감했다.

82년 직장을 그만두고 슈퍼마켓과 식당 등을 차렸지만 재정적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도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은 철저하게 순종했다. 경영악화로 사업체가 빚더미에 앉은 데다 화재사고 등 악재가 잇따랐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고난은 소망이 있기에 낙심하지 않았다. 사업을 접고 직업을 구하기 위해 40일 작정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응답해주셨다. 오래전에 지원한 독일 항공사인 루프트한자의 입사허락 편지였다. 그는 독일 항공사 서비스팀에서 15년을 근무하며 모든 빚을 갚고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 무엇을 할지 가족과 함께 합심으로 기도한 후 호텔사업을 시작했다. ‘엘림호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엘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도중 쉬어가던 곳이다. 그는 운영하는 호텔이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이들이 영적인 쉼을 얻는 예배의 장소가 되길 소망했다.

그는 호텔에서 매주 목장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호텔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경제도시 프랑크푸르트에는 한국기업의 주재원 가정이 많았다. 그의 전도로 믿지 않는 20가정이 주님께로 돌아왔다. 인생의 고비마다 하나님은 정 장로와 함께했다. 어린시절 1500m 산꼭대기에서도, 1000m 아헨탄광 지하 막장에서도, 아비규환의 월남전에서도 하나님은 묵묵히 당신의 자녀를 기다리셨다.

“고국이 저의 육신을 태어나게 한 곳이라면, 독일은 영적인 생명으로 거듭나게 한 땅입니다. 저를 독일 땅에 부르신 목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는 새해가 되면 금식기도를 드린다. 그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에 반응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독일 땅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로, 여생을 사도바울처럼 복음전달자로 쓰임받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박경란<재독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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