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산들바람과 칼바람

국민일보

[살며 사랑하며-김서정] 산들바람과 칼바람

입력 2018-01-1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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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제주에 바람이 거세다. 배도 운항 중지, 비행기도 타기 어렵다. 광주에 갔던 사촌 일가족은 이틀째 발이 묶여 있다. 나는 내일 아침 서울에 가야 하는데, 비행기가 제대로 뜰지 모르겠다. 공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8년 전 브라질 아동청소년도서전에서 한국이 주빈국이었던 해의 일이 떠오른다. 나는 한국 어린이 책에 관해 발표하기로 하고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했다. 집을 떠나 리우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30시간. 파리 공항에서 환승 대기 5시간. 동행도 없었던지라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다. 어쩌자고 책을 안 챙겼던 나는 할 수 없이 공항 서점을 뒤졌고, 가장 평온해 보이는 표지의 책을 골랐다. 영국 작가 크리스 클리브의 ‘The Other Hand’(번역본 제목은 ‘리틀 비’이다).

하지만 표지와 달리 책 내용은 무시무시한 격랑의 연속이었다. 나이지리아 한 마을에서 석유 때문에 벌어지는 부족민 몰살, 유일하게 살아 남아 도망치는 자매를 끝까지 쫓는 살인자들, 해변에 닿은 그들과 맞닥뜨리는 영국인 부부. 멋진 휴가를 꿈꾸며 온 그들은 이 만남으로 인해 하나는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하나는 목숨을 끊는다. 길고 힘든 여정에 어렵고 무거운 임무, 개인적 마음의 소용돌이에 시달리던 내게 이 책은 치명타였다. 나는 완전 녹초가 되었지만, 이상하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건 아주 훌륭한 소설이었다. 시작은 산들바람이었으나 시간과 함께 칼바람으로 변하는 인생의 어떤 국면. 그 안에서 피투성이로 절망하고 있자면 칼바람은 잦아들고 산들바람이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줌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심하지 마라, 칼바람은 언제든 다시 온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불고 있다, 그런 말 없는 전언을 건네고 있었다. 집 밖의 바람소리가 귀를 찢을 듯 날카롭고 높아지다가 낮아지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따뜻한 집 안에서 태평한 얼굴로 졸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나는 그 녹초의 시간들을 되살려낸다. 안심하지 마라, 하지만 감사해라.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글=김서정(동화작가·평론가),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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