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조민영] ‘경력 내 단절’의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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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조민영] ‘경력 내 단절’의 부담

입력 2018-01-11 17:37 수정 2018-01-1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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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쉼이 많았다. 큰아이를 낳은 뒤 8개월의 육아휴직을 썼다. 그리 오래전은 아닌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출산휴가까지 1년 가까이 쉰 사람은 사내에 거의 없었다. 한참 할 일도 많고 책임도 커지기 시작하던 입사 6∼7년차 때 일이다. 그리고 2년여 뒤 다시 둘째를 출산하고 1년을 휴직했다. 마지막 쉼이라 여겼다.

그러나 육아와 일의 병행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다행히 큰아이 때 다 쓰지 못해 남아 있던 육아휴직 카드가 다시 동원됐다. 세달 반의 시간이 다시 주어졌다. 저녁 자리가 많고 그것이 사실상 일인 직업. 불규칙하고 야근은 물론 휴일 근무도 일상인 일. 아이를 둘 낳고 키우며 10년 넘게 그런 직장생활을 유지했다. 분명히 앞서 말한 여러 차례 쉼의 덕이다. 육아휴직을 쓸 수 없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터다.

일을 기준으로 볼 때 쉼은 엄연한 공백기다. 육아를 위한 쉼은 오롯이 아이와의 시간으로 행복했지만 진정한 휴식기는 당연히 아니었다. 일의 측면에서는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하거나 배워본 적 없었던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에 갑자기 부닥쳐 허우적댔다. 쉼을 통해 재충전하거나 기존 나의 경력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할 여지 같은 건 없었다. 한 생명을 낳고 잘 돌보고 키우는 일의 무거움은 누가 부러 말하지 않아도 오롯이 내 몫으로 다가왔다. 아이를 낳기 전 키워왔던 경력은 무용지물이었다. 내게 과거의 경력은 잊혀진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육아업무는 내게 주어진 새로운 경력 같은 거였다. 온 힘을 쏟아부었다.

문제는 육아 경력기가 끝난 후였다. ‘육아 경력’에 매달린 동안 원래의 경력은 말 그대로 단절됐다. 더욱이 1년으로 끝나는 육아업무가 아니다. 맞벌이로 일하는 남편은 복직 이후 육아에 더 많이 동참하고자 애썼지만, 그나마 1년이라도 (육아)업무를 해본 이에게 쏠리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다. 사회 분위기부터가 육아휴직을 쓸 수 있게 ‘배려 받은’ 워킹맘이 주된 육아 업무자인 것을 자연스러워 했다. 처음엔 어린아이가 집에 있으니 다들 남는 회식 자리에서 나만 먼저 일어나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배려’만도 감사했다. 남들보다 좀 더 빨리 퇴근할 때도 왕왕 있었다. 눈치도 보이고 때로는 미안하지만 일·가정 양립이 받아들여지려면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나름의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육아뿐 아니라 그 배려마저 무거워졌다. 내게 몰려 있는 의무를 다하면서 ‘쉼’을 반복하느라 내 공백은 점점 커졌다.

배부른 소리라 할 수 있다. 휴직할 수 있었고 복직도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 여성이 육아를 병행하고 이들에게 일·가정 양립의 과업이 주어지는 분위기 속에서는 언제든 경력 포기의 위기는 닥쳐온다. 여전히 대부분의 근로자가 일에 매달려 경쟁하는한 육아를 홀로 병행해야 하는 워킹맘은 육아 부담뿐 아니라 일에서도 홀로 뒤처진다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만 20∼49세 남녀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여성의 33.5%가 육아휴직시 경력 단절로 인한 경쟁력 저하가 가장 걱정됐다고 답했다. 소위 ‘아빠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조차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하면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섰다. 육아휴직 후 복직한 남성의 경우 75.5%가 야근을 줄이고 육아에 동참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답했다.

그동안 육아휴직 제도 확대 등 정부 정책이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육아를 전담하는 이가 특정되고 그에게 ‘배려’라는 명목으로 일·가정을 병행하는 총대를 메는 한 경력단절의 예고편인 ‘경력 내 단절’은 반복된다. 아이가 있는 아빠도, 아이가 없는 싱글도, 육아와 가정과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진정한 ‘일과 삶의 균형(워라벨)’이 실현돼야 하는 이유다.

조민영 사회부 차장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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