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앞두고… 비운의 ‘빙속 황제’, 마지막 질주

국민일보

축제 앞두고… 비운의 ‘빙속 황제’, 마지막 질주

입력 2018-01-13 05:01
  • 국민일보 카카오플러스 친구등록하기

기사사진

이강석이 12일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빙판 위를 질주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기사사진

12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이강석이 팬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모습. 최현규 기자
이전사진 다음사진
1 2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던 ‘빙속왕’ 이강석(33)이 12일 전국동계체육대회를 끝으로 빙판을 떠났다.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와 함께 남자 일반부 500m 5조에서 레이스를 펼친 이강석은 36초47이라는 마지막 공식 기록을 남겼다. 최종 순위는 7위였다. 그가 세운 뒤 11년째 깨지지 않는 한국신기록(34초20)에 비할 수 없었지만 이강석은 “후회 없이 달렸다”고 말했다.

이강석은 “고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 마지막 무대였다면 마치 영화 같았을 것”이라면서도 “전국 최고 대회인 동계체전에서 은퇴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강석은 의정부시청 빙상단 코치 임명장을 받고서도 평창올림픽에 계속 도전해 왔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국제빙상연맹(ISU) 월드컵대표 선발전에서 11위에 머물러 탈락하며 평창의 꿈을 접고 은퇴를 결심했다.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단거리의 최강자였으면서도 유독 올림픽 금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큰 무대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 때에는 500m 결승 2시간 전 스케이트화가 부서졌다. 대표팀 감독이 직접 대회장 인근 구둣방에서 찢어진 스케이트화를 수선해 왔지만, 평소의 착용 느낌과 같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열정으로 달려 동메달을 따냈다.

세계랭킹 1위로서 참가했던 2010년 밴쿠버올림픽 때에는 갑작스런 정빙기 고장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한 차례 워밍업을 한 뒤 시합 개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작 시점은 점점 늦어졌고, 리듬이 깨져 버렸다. 모두가 금메달을 예상한 올림픽의 결과는 4위였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기량이 하강 곡선을 그릴 때였다. 이강석은 “올림픽을 생각하면 슬프다”며 “내 스스로 한심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꼽는 최고의 순간은 2007년 3월 세계신기록 달성의 순간이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오벌(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세계종별선수권대회였다. 빙질이 좋아 모든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노리고 있었다.

마지막 곡선 주로를 빠져나올 때 속도를 이기지 못해 넘어질 뻔했지만, 평소 다짐한 대로 차분하게 중심이동을 해냈다. 이강석은 “라이벌이던 조지 카토(일본)의 기록을 깬 것이었는데, 경기장 기록판에서 일본 선수의 이름을 빼고 내 이름을 넣은 게 그렇게 기분좋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 순간 한국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ISU 홈페이지의 경기결과를 지켜보다 환호했던 이강석의 부모는 이날 12일에는 경기장을 찾았다. 달리는 이강석을 향해 “끝까지”를 외쳤다. 평소에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지만 이날만큼은 가까이에서 보겠다며, 이강석의 부모는 사진촬영구역에서 아들을 응원했다. 은퇴하는 아들에게 건넬 꽃다발 카드에는 ‘고맙다’는 말을 써왔다.

이강석의 어머니 노정희(58)씨는 “아들이 혼신의 모습으로 달려준 모든 경기가 아름답고 고마웠다”고 말했다. YMCA 아기스포츠단에 다니던 7살 이강석이 스케이트를 신자마자 빙판 위에 똑바로 서는 것을 보고, “소질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이강석의 아버지 이기훈(58)씨는 “선수생활의 모든 노하우를 후배 양성에 잘 활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강석은 경기 직전 “전날 잠을 잘 못 잤다”고 털어놨다. 그는 “수백 번 이상 500m를 탔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설레는 맘마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의정부시청 빙상단 코치, 방송 해설위원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다. 이강석은 “후련한 마음으로, 평창에서 달릴 후배들을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이강석은 토리노올림픽을 준비하던 때부터 ‘운동일지’를 기록했다. 스타트 첫 발이 늦었는지, 피치가 어땠는지 등을 남긴 것이 대학노트 분량으로 7권이다. 그에게 “오늘의 은퇴 경기도 일지로 남기겠느냐”고 묻자 “‘나의 모든 것을 걸었던 스케이트 인생이었다’고 적겠다”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겠느냐”고 묻자 “세계신기록에 도전하겠다”고 대답했다.

글=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

많이 본 기사

반려인 연구소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