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천지우]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국민일보

[한마당-천지우]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입력 2018-02-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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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 데버러 립스타트 미국 에모리대 교수는 “극단적인 역사 다시 쓰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끔찍했던 과거를 직시하는 모범적 모델이던 유럽이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폴란드의 행태를 두고 나온 우려다. 우파 민족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 폴란드에서는 ‘홀로코스트 발언법’이 시행을 앞두고 있다. 2차대전 때 폴란드 안에서 벌어진 나치의 잔학 행위에 대해 폴란드인의 책임을 거론하면 내외국인 가리지 않고 처벌하는 법이다. 나치가 폴란드에 설치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폴란드의 수용소’라고 부르면 최대 징역 3년에 처하는 식이다.

이해가 되는 측면이 아예 없지는 않다. 2차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됐고, 200만명에 달하는 폴란드인이 사망했다. 폴란드인 일부가 나치에 부역한 것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폴란드는 전적으로 피해자이니 조금이라도 가해자 취급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식의 법은 정도를 벗어났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학살은 독일이 했지만 조력자도 잊어선 안 된다. 폴란드는 비난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폴란드 출신 역사학자 얀 그라보프스키는 전쟁 기간 최소 20만명의 유대인 죽음에 폴란드의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스라엘 기자가 “내 어머니가 폴란드 이웃의 밀고로 게슈타포에 잡힐 뻔했다가 겨우 도망친 실화를 폴란드에서 이야기하면 처벌받나”고 묻자 마테우스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폴란드인 가해자만 아니라 유대인 가해자도, 러시아인 가해자도 있었다고 말하면 처벌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나만 가해자인 상황은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임지현 서강대 교수가 명명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영웅’에서 ‘희생자’ 중심으로 서사구조가 바뀐, 비극적 희생의 기억을 자기 정당화의 기제로 삼는 민족주의다. 이것이 유행처럼 퍼져서 각 나라가 “우리 민족이 더 많이 희생됐다”며 서로 싸우는 형국이 되고 있다.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고 판단하는 것은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의 민족적 소속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 행위를 준거로 해야 옳을 것이다. 인종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개개인을 절대범주화해 역사를 재단한다면 유대인을 뭉뚱그려 처단한 나치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천지우 기자

삽화=이영은 기자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