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내 땅 팔아 신학교 지어라… ‘사람 낚는 어부’ 예비하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내 땅 팔아 신학교 지어라… ‘사람 낚는 어부’ 예비하다

장신대 설립 ‘초석’ 신용우 장로와 경남 거제 하청교회

입력 2018-06-30 00:01 수정 2018-08-1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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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1895∼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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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완공된 하청교회 예배당. 6·25전쟁 직후 거제포로수용소 폐자재로 지은 예배당을 헐고 지었다. 지금은 교육관으로 쓰인다. 땡볕 강한 지난 21일 이 교회 오명석 목사가 양산을 쓰고 지나고 있다. 선명한 장애인 배려 주차 라인이 교회의 역할을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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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헌당예배를 마치고 흩어지는 모습(왼쪽) . ‘하청교회’ 이름을 새기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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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기념관(왼쪽)과 1990년 완공된 본당. 100주년기념관은 엘리베이터, 게스트하우스 등도 갖췄다(위 사진). 맹종죽 숲 사이를 헤치며 옛 교회터를 돌아보는 오명석 목사(왼쪽)와 신용부 장로(가운데 사진). 오명석 목사(왼쪽)와 장로 등이 100주년기념관에 전시된 교회 역사 자료를 돌아보고 있다(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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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가 장신대 법인설립을 위해 기증한 재산기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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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설립 ‘초석’ 신용우 장로와 경남 거제 하청교회

지난 17일 경남 거제시 하청면 하청교회(오명석 목사)는 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오명석 목사는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라는 제목의 말씀을 선포했다. 오 목사는 하청교회 역할에 대해 ‘서양문물 도입과 계몽운동’‘교육을 통한 지도자 양육’을 꼽았다. 설교 본문은‘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였다.

100년 전 하청면은 섬 오지였다. 지금은 부산항만-가덕도-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가 세워져 섬 오지가 부산권이 됐다. 부산역까지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대교가 생활기반을 빨아들이는 통로가 되면서 공동체 쇠락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부산권 드라이빙족을 겨냥한 면 소재지의 ‘브랜드 파워’ 카페가 지역공동체의 현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이 한적한 반농반어 지역사회에서 활기를 띠는 곳도 있다. 교회와 학교다. 주일이면 2800여명 면 주민 가운데 300여명이 하청교회에 출석한다. 또 평일 하교시간이면 경남산업고교 재학생 900여명과 하청중, 하청초교 학생들로 소란스럽다. 학교는 교회 설립 이후 교회에서 시작한 야학이 계승 발전돼 오늘에 이르렀다.

‘시골교회’에 속하는 하청교회는 교회의 역할과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기독교교육을 통한 지도자 양육이 끊임없이 이뤄져 100년의 세월 동안 교회를 유지, 발전시켜 오는 힘이 됐기 때문이다.


시골교회 장로, ‘다음세대’를 준비하다

이 시골교회 장로였던 신용우는 기독교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다음세대’를 준비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신앙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자신이 가진 땅을 내놓아 신학교육의 산실 장로회신학대 설립에 초석을 다진 선각자이기도 하다. 그는 1945년 6월 장신대 설립 기본 재산이 부족해 재단이 신학교를 개교하지 못하자 거제도 땅 100만㎡를 학교에 기부했다. 장신대 재단이사회는 2007년 4월 신용우의 공적비 제막 예배를 갖고 그의 뜻을 기리기도 했다.

신용우는 서부경남 최고 학교인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한 영농 선구자였다.

그의 삶을 기록으로 정리한 김백훈(80·전 경남산업고 교장) 은퇴장로는 “신 장로님은 신학교 재단 설립이 민족복음화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넘쳤고 그것이 곧 하나님 명령이라는 것을 확고히 인식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하청교회에서 불과 10㎞ 떨어진 거제 옥포교회 진정률 장로도 송창근(납북 사망·1898∼1950) 목사의 권면으로 자신의 땅을 팔아 한신대 설립에 기여한 것을 보면 거제도가 한국의 신학교육에 특별한 땅임이 틀림없다.

장신대와 한신대는 우리나라 신학교육의 뿌리인 평양신학교가 해방과 함께 공산당에 의해 폐교 수순을 밟자 그 후신으로 설립된 학교들이다.

거제도는 호주장로회의 선교정책에 따라 바닷가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됐다. 하청교회 설립자 신영지는 진해(현 경남 창원시 일부) 웅천에 사는 주성찬으로부터 전도받아 신약성서를 열독 후 전 가족과 함께 교인이 됐다. 그리고 자택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한 것이 하청교회의 시작이다. 호주장로회 조선선교부 소속 교회였다.

김 장로는 “초기 성도들은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마을에서 생활하기 어려울 만큼 따돌림을 받았다”며 “마을 사람들은 서양 귀신 믿는 이들이 조랑말 타고 포교를 다니게 할 수 없다며 하마(下馬)를 요구하는 등 박해가 심했다는 얘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당시 신용우는 여유가 있는 독농가 자제였다. 진주농고 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농촌계몽운동을 했고 하청교회는 그 활동의 중심이었다. 이 무렵 남해안 일대 수산업은 투자이주한 일본인들이 잡고 있었다. 거제 바다는 황금 멸치어장이었으나 무동력선으로 어업을 하던 조선 어부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어업허가권을 쥐고 철저히 조선 어업인을 배제했다.

농학사로 불리던 신용우는 경남 모범 영농인으로 뽑혀 일본 선진농업 견학을 가게 됐다. 그의 나이 스물둘 무렵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고향 토양에 알맞은 경제 작물을 발견하고 그 모종을 가지고 들어왔다. 일본 기후에 맞는 맹종죽이었다. 흔히 일본죽이라고도 하는데 죽피에 흑갈색 반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용우는 맹종죽 세 그루 중 두 그루의 생육에 성공한 후 교인과 마을 농민들에게 맹종죽 농사를 권했다. 중국요리 등에 많이 들어가는 맹종죽순이 ‘문익점의 목화씨’와 같은 경제 작물이 된 것이다. 그는 처음 5년간 오직 교회와 대밭만을 오가며 농사꾼으로 살았다.

맹종죽 농사 3년째 어른 팔뚝 굵기의 죽순을 수확하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열심히 일해 가꾸고 다스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며 조건 없이 재배 기술을 알려줬다.

오늘날 거제도는 맹종죽 테마파크가 있을 정도로 섬 전체에 맹종죽이 지천이다. 하청교회와 주변 마을 역시 맹종죽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지난 목요일. 이 교회 오 목사와 신용부 시무장로가 교회 맞은편 해명고개를 넘었다. 이 고개는 하청리와 유계리를 잇는 지름길로 박해를 피해 예배당을 세웠던 교회터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해명고개 예배당은 1936년 큰 태풍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자리가 지금 맹종죽 숲이 됐다. 2년 전 부임한 오 목사는 토박이 시무장로에게 옛 교회터에 얽힌 역사를 들었다.

부를 이뤄 기독교교육 강화할 수 있다면

신용우가 고향으로 돌아와 집사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25∼33년 하청교회는 흥왕을 거듭했고 하청중앙교회라는 이름으로 분립할 만큼 성장했다. 맹종죽 농사로 부를 쌓은 신용우와 교인들은 하청중 뒤에 함석지붕을 인 79㎡ 넓이의 예배당을 세울 수 있었다.

이 무렵 일본의 무단통치는 작은 시골 마을조차도 황국신민의 예를 강요했다. 선교사들 때문에 노골적으로 교회를 박해하지는 않았으나 ‘교회연합’이라는 명목하에 지역마다 하나의 교회만 남기고 통폐합하려 했다.

그 배경에 민족교회운동이 있었다. 거제도 역시 1910∼20년대 야학운동 등으로 민족교회운동에 동참했다. 하청교회는 거제도 야학과 지역 3·1운동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1940년을 전후해 일제는 ‘교회의 필신(筆新)’이란 항목을 만들어 목사라는 표기 대신 ‘기독교 교사’로 통일하라고 할 만큼 교묘히 탄압했고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폭력적으로 변했다.

한편 신용우가 영농에 능력을 보이자 주민들은 면장으로 추대해 마을을 더욱 발전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면장을 하면서 일제에 소심한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富)를 이뤄야만 평생 노예로 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장로로서 교회가 대중을 무지에서 탈출시키는 것만이 복된 세상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신용우의 장신대 땅 기부는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대한 마음의 빚이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해방 후 교회 영수가 됐다. 그만큼 신망이 높았다. 오늘날 거제도 사람들은 중국산 죽순이 싼값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죽순을 팔아 자녀들 대학을 보냈다. 1980년대까지 거제도가 전국 죽순 물량의 80%를 감당했다.

하청교회는 시골교회임에도 높은 출석률과 재정자립도를 자랑한다. ‘100주년 기념예배당’은 대도시 역사교회 기념예배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 그들은 다시 100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 낚는 어부’를 기르는 기독교교육 공동체가 하청교회의 선교목표다. 그 교회 밑거름이 됐던 ‘장로 신용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기독교인으로 여전히 칭송받고 있었다.

“배워 부자 되고 부자 돼 베풀자”오줌장군 져 나르며 대나무 농사

신용우는 시골교회 장로로 늘 새벽 기도 후 대밭에 나가 성실하게 일했다. 전통적인 농법에만 매달린 농민들에게 새 영농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가진 농업 기술을 모두 알려주고 싶었던 농촌계몽운동가였다. 심훈의 ‘상록수’에 그려진 내용처럼 농촌계몽운동을 교회를 중심으로 펼쳤다.

그는 일본산 맹종죽 이식 초기 하루 세끼를 대밭에서 먹으며 일했다. 오줌장군을 지게로 져 나르는 농사꾼이었다. 5년간 그는 양복 입은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며 일했다. 기도와 노동이 전부였다.

그는 1929년 거제기독청년회(YMCA) 산업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는데 YMCA 내 흔하지 않은 조직이었다. 그만큼 시골에서 드물게 신사고를 하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청지기의 자세로 솔선수범하며 죽순 농사를 짓는 그에게 권농 사무를 담당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제강점기과 해방 직후 한 차례씩 면장을 하고 경남도의원까지 지낸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를 기억하는 원로 권사들이 말했다.

“신 장로는 평생 교회 아니면 대밭에 있었어요.‘아 교회 다니는 분들은 다 저렇게 성실히 사니 부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죠. 배워 부자 되고 부자 돼서 베풀자고 하셨어요.”

거제=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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