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구원은 ‘의로움’보다 ‘오직 믿음’ 통해 주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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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생명력을] 구원은 ‘의로움’보다 ‘오직 믿음’ 통해 주어지는 것

<7> ‘오직 믿음’은 순종의 삶이다

입력 2018-07-0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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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진정한 성도는 그 은혜를 남용하지 않는다. 독일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율법과 은혜’(1529년). 가운데 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율법에 따른 정죄, 죽음을 나타내고 오른쪽은 예수 십자가를 통한 은혜, 복음을 의미한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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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노엘 페이튼의 ‘새벽: 에르푸르트의 루터’(1861년). 마르틴 루터는 로마 교황의 박해 때문에 번뇌하다가 수도원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통해 이신칭의의 교리에 도달한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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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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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안에는 윤리 의식을 회복하고 성도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이신칭의’ 교리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줘야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밑바닥엔 ‘이신칭의를 강조하다 보면 윤리 의식이 약화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도 순종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어떤 죄를 지어도 된다’는 일종의 면죄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죄라는 것을 안다면 ‘오직 믿음으로’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믿음과 순종의 긴밀한 상관성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오직 믿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구원의 은혜 앞에서 방종의 삶을 살지 않는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 3권 16장 1절에서 선행으로 표현되는 순종이 이신칭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는 선행 없는 신앙이나 선행 없는 이신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신앙과 선행이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칭의는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신앙에 달린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우리가 믿음만이 아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의와 구원을 얻는 데 행함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과 야고보를 통해 주신 말씀은 과연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 말씀은 믿음과 순종을 분리하지 않는다. 바울서신, 특별히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도 행함을 믿음의 필수 요소라고 강조한다.

참된 믿음, 행함의 동기로 작용

믿음은 행함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의 동기로 작용한다. 다만 믿음 없는 행함과 믿음 있는 행함만 있을 뿐이다.

성경은 전자를 가짜 선행이라고 말한다. 참된 믿음은 작은 선행으로라도 나타나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선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 감격하며 그 은혜를 붙잡는 믿음이 없는 것은 참된 선행이 아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선행이 아니다.

순종과 행위, 제자도가 결여된 믿음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거짓 믿음에 불과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죄인이 칭의를 받는 것은 행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믿는 자가 죄의 종으로 살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그러기에 은혜를 핑계로 삼아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 불순종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믿는 자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순종을 통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됐다. 과거에는 몸을 부정과 불법의 종으로 만들어 불법에 이른 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몸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드리고 거룩함에 이르러 열매를 맺어야 한다.

구원받은 후 성령의 능력 받아야

구원은 우리의 어떤 공로나 자격 때문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순종의 열매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말과 행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함이 구원의 그 어떤 근거나 자격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참된 믿음을 나타내려는 실천운동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영적 생명을 회복할 때 가능한 일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의 변화된 삶도 믿음과 성령을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강조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신념에 불과할 것이다.

참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자라야 한다. 육체가 성장하는 것처럼 믿음도 계속 성장하고 더 깊어진다. 특히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갈 3:3)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실천의 주된 동력은 우리 자신이 아닌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에서 나와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덧입기 위해 우리는 기도와 성령운동에 힘써야 한다.

믿음은 사랑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

오직 믿음은 구원의 방편일 뿐만 아니라 순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부여한다. 구원의 은혜를 붙들 때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주어진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바로 알고 고백해야 한다.(요일 5:1)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머리와 지식만으로 참되게 알 수 없다. 지식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닐 수 없다. 그것으론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

믿음은 말과 혀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죄 없는 아들을 육체로 보내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를 다 쏟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아들의 희생을 통해 나타내셨다. 우리의 믿음도 사랑과 희생, 섬김과 봉사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자아를 복종시키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님의 사랑처럼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이 살게 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나’라는 육의 존재를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시도록 내 육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며 십자가 승리를 맛보고 세상을 이기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와 구원을 얻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병 고침과 기적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다. 세상을 이기게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 11:1)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리라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약속이 주는 혜택을 누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장종현 목사 (백석대 총장)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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