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9> 이상애 권사

국민일보

[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9> 이상애 권사

복음에 쓰임받은 ‘믿음의 맏딸’

입력 2018-07-0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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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 이상애 권사(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2006년 독일 도르트문트 한인교회 성도들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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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교회 성도의 고희 잔치에서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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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독일 병원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이상애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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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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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순간은 영원한 본향을 가는 길에 선 잠깐의 멈춤이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지만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 아쉬워 롯의 아내처럼 삶에 고개를 돌린다. 때론 거친 파도처럼, 때론 단단한 벽을 마주하는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절망한다. 하지만 소망의 옷으로 갈아입자 잠시의 이별은 숨 고르기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배웅의 손을 흔들고 따뜻이 보듬어주는 이가 있다면 본향 가는 길이 좀 더 편안해진다. 이상애(74) 권사는 7년 전 남편 송세준 집사의 천국 환송 당시를 떠올렸다.

“그날 아침, 남편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목욕시키고 마사지를 했는데, 남편 하는 말이 ‘레이건 대통령도 치매로 아내를 못 알아봤는데 나는 이렇게 마누라 간호받으면서 하늘나라 가니 행복하다’면서 편안히 눈을 감았어요.”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 뤼베크. 이 권사는 매일 아침 남편의 무덤을 찾는다. 적막이 흐르는 곳에서 꽃에 물을 주며 깊은 평안 가운데 하나님과 만난다. 이 권사는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에서의 삶이 반세기를 넘겼다.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고향 땅은 이제 고국이 아닌 천국이 됐다.

돌이켜보니 눈물을 삼키며 기도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는 1967년 23세 나이에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 병동생활은 척박한 광야 같았다. 낯선 독일어는 물론 작은 체구에 큰 덩치의 독일 환자는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눈물의 홀로서기였다. 하지만 광야에서 의연해질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일 때였다.

그는 16세에 위독한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믿었다. 급할 때 찾았던 이기적인 그를 주님은 피 흘린 몸으로 안아주셨다. 그것은 강렬한 은혜였다. 불신자인 부모님께 좋으신 하나님을 알렸지만 싸늘한 시선만 돌아왔다.

“그땐 여자들이 어두울 때 나가면 안 됐지요. 밤에 기도하러 갈라치면 어머니가 어찌나 야단을 치시고 핍박을 하시던지….”

그는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자 어디든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당시 시작된 파독 간호사 모집은 그에게 선교에 대한 또 하나의 불씨였다. 딸의 결혼을 서두르던 어머니는 독일행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때였다. 이 권사는 독일 가기 전 무엇보다 어머니의 영혼 구원이 급했다. 어머니를 전도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께서 꿈속에서라도 어머니를 직접 만나 달라’고 간청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어머니 꿈에 나타나셨대요. ‘너는 그저 잠만 자고 있느냐. 네 딸은 널 위해 기도한다. 지금이라도 깨어나라’고 하셨대요. 그 꿈이 너무 생생해 일어나 보니 새벽 종소리가 들렸고 발걸음이 교회로 옮겨졌대요. 그 주일날에 부흥회가 열렸는데 그때 하나님을 만나신 거죠.”

어머니를 시작으로 형제들까지 온 가족 복음화가 실현됐다. 하나님은 이 권사를 ‘믿음의 큰딸’로 택하셔서 가족 선교의 발판으로 삼으셨다. 그는 독일 도르트문트에 오자마자 한인예배가 그리워 여러 도시를 찾아다녔다. 하나님은 한인교회 창립의 마음을 주셨고, 80년에는 성도들의 기도가 모아져 도르트문트 한인교회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초창기 겨자씨 같은 교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비와 바람, 된서리도 맞았지만 눈물의 기도는 50년의 풍상을 견뎌갔다. 기도로 자란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자신들이 떠나온 곳과 머무는 자리에서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코이노니아가 됐다. 코이노니아는 ‘공유하다’ ‘남과 함께 나누다’라는 의미로 성경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 또는 성도 사이의 친교를 의미한다.

70년에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 “사실 예수님을 믿겠다고 해서 전도를 위해 결혼했는데, 막상 예배는커녕 저의 신앙생활을 탄압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우리 부부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데 제 남편을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남편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하나님은 암을 통해 만나주셨어요.”

92년 남편은 항암치료 중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다. 하나님은 남편의 영과 육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동안 이 권사에게 ‘예수를 극성맞게 믿는다’며 박해했지만 막상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니 아내의 기도에 감사했다. 부부는 질병을 통해 겸손으로 주님께 나아갔다. 성경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처럼 복음 사역의 도우미로 교회 공동체에 전심을 바쳤다. 그러던 2011년 남편에게 뇌종양이 발병했다.

남편은 발병 후 오직 감사와 기도를 드렸다. 4개월 뒤 이 권사에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을 불러 달라고 했다. 남편을 부둥켜안고 4절까지 부르고 이어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힘차게 찬양하며 남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남편의 마지막은 환한 미소였다. 마치 천국에 잘 도착했다는 표식 같았다.

“곧바로 아들에게 전화해서 ‘아버지 가셨다’고 말했더니 아들이 ‘어제 아버지에게 내일 보자고 했더니, 아버지가 내일은 천국 간다’고 했다더군요.”

이 권사의 기도는 언젠가 자신의 영혼을 부를 때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육신이 필요한 날까지 복음에 쓰임받고 마지막 선물이 주어지는 그날까지 오늘을 감사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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