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이은형] ‘빨리 빨리’를 버려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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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평-이은형] ‘빨리 빨리’를 버려야 할 때

입력 2018-07-1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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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계산대에 줄을 서려고 보니 모든 줄이 꽤 길다. 어디가 가장 짧은가 재빨리 재 본 후 줄을 선택한다. 그때부터는 인내심 테스트가 시작된다. 계산원은 손님에게 안부를 묻는다. 이런저런 간단한 대화를 나누면서 바코드를 찍고 물건을 계산하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손님에게 ‘현금이냐 카드냐’ ‘물건 담아갈 봉지가 필요하냐’ ‘멤버십 카드가 있냐, 없으면 만들어 드릴까’ 등 질문도 많이 하고 설명도 많이 한다. 손님이 나이 드신 분이면 시간은 배로 늘어난다. 아무도 재촉하거나 짜증내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아, 한국의 계산원들은 얼마나 손이 빠르고 정확하고 친절한가!’

미국 포틀랜드에 1년 체류하던 기간, 거의 DNA에 새겨지다시피 한 ‘빨리빨리’에서 벗어나 현지 시간마인드에 적응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를 벗어나 여행을 하거나 장기체류할 때 우리는 종종 절감한다. 슈퍼마켓에서 장 볼 때, 한밤중에 배가 출출해서 뭔가 먹고 싶을 때, 이사할 때, 전기 및 통신 등 각종 공공 서비스를 받을 때,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할 때, 집안에 사소한 고장으로 ‘수리아저씨’를 불러야 할 때 ‘아, 한국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거의 모든 서비스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아예 서비스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의 소비자들이 착해서 그렇게 느리고 비싼 서비스를 참는 것일까. 아니면 그곳 비즈니스맨들이 ‘택배’ ‘배달서비스’와 같은 기가 막힌 사업 기회를 미처 못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한국의 소비자들이 편리하고 저렴하게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빨리빨리’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먹이사슬의 끝에서 생존을 걸고 매달려 있는 수많은 노동력 덕분이다. ‘알바’라 불리는 파트타이머, 좋게 불러 ‘○○라이더’라 하지만 목숨 걸고 차량 사이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배달원들, 배달 한 건당 몇 백원 받는다는 택배기사들, 위험은 전가하고 가격은 깎아내리는 원청업체의 압박에도 꼼짝 못하는 하청 및 재하청업체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청년들이다.

몇 분 안에 배달해드린다는 회사 측의 홍보문구 때문에 오토바이 인명 사고가 잦았던 어느 피자회사의 배달원들, 하루 250건 이상 배달하느라 식사는 대충 차안에서 때우면서 건강을 담보 잡힌 택배기사들, 고객사 직원의 독촉에 컵라면조차 먹지 못하고 안전도 신경 쓰지 못한 채 스크린도어 고치다 목숨까지 잃은 하청업체의 파견직 19세 청년, 기내식 시간 맞춰 납품 못하면 물건값의 50%를 깎인다는 조건 때문에 28시간째 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하청업체 사장. 빨리빨리는 이처럼 먹이사슬을 타고 내려갈수록 압박이 되고 더 가혹해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의 ‘삶의 질(Better Life)’지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영역 간 심각한 불균형을 보인다. 경제성장을 했지만 그에 맞는 삶의 질 향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근로자 간 임금격차는 가장 큰 편에 속하고 특히 저임금 근로자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오토바이 배달원, 대리기사 등 특수고용직에 해당하는 인력 통계는 그나마 여기에서 빠졌을 것으로 추정되니 상황은 더 심각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포용성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을 시행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행과 속도, 범위 등은 앞으로 많은 논의와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발은 내디뎌야 한다. 먼저 우리는 ‘빨리빨리’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안전, 건강, 사생활을 포기하면서 값싼 일자리라도 잡으려는 그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누리는 ‘빠른 서비스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요즘 같은 날 월드컵 보면서 치킨 시킬 때 ‘천천히 오세요’ 요청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은형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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