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사로] 어려움≠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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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사로] 어려움≠약함

입력 2018-09-0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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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인도네시아 팔렘방의 JSC 테니스 코트. 흠뻑 땀에 젖어 상체에 달라붙은 티셔츠를 떼어내던 한 선수가 소리 없이 오른손을 불끈 쥐며 들어 보였다. “파이팅!” 제스처에 어울릴 만한 외침은 선수 좌우에 나란히 선 코칭스태프의 몫이었다. ‘소리 없는 도전’이란 수식어를 달고 출전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테니스 단식에서 동메달을 딴 이덕희(20) 선수의 경기 후 모습이다.

파워 넘치는 스트로크와 절묘한 발리를 주 무기로 하는 그에겐 테니스 선수로선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선천적 청각장애 3급. 이덕희에겐 라켓과 코트에 쉴 새 없이 부딪히며 울려 퍼지는 공 소리도, 자신을 응원하는 관중석의 함성도 들리지 않는다. 심판의 판정을 듣지 못해 라인아웃 상황에서 혼자 플레이를 계속하기도 한다.

핸디캡을 극복한 이덕희는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이형택 이후 12년 만에 남자 테니스 단식 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 무대가 패럴림픽이 아니라 비장애인들과 경쟁을 펼치는 코트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테니스 팬들은 2016년 11월 실린 뉴욕타임스(NYT) 기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기사의 제목은 ‘청각장애인 테니스 선수에게 들리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For Deaf Tennis Player, Sound Is No Barrier)’. NYT는 “이덕희는 테니스에 관한 통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가 세계랭킹 200위권 내에 막 진입한 대한민국 테니스 선수를 집중 조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 청각장애를 가진 선수가 세계적 수준에 오른 것 자체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평균 속도가 시속 200㎞에 달하는 강서브와 스트로크를 주고받는 테니스에선 시각보다 청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경기할 때 눈이 아니라 귀를 사용한다. 청각을 통해 공의 회전력과 스피드를 예측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덕희는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들리지 않기 때문에 테니스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사촌 형이기도 한 우충효 코치는 “덕희가 경기 중 상대방의 동작을 보고 구질을 예측하는 방식으로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다”고 설명했다. 청각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시각의 정확성을 보완하기 위해 이덕희가 코트 위에 쏟았을 노력은 이루 짐작하기도 힘들다. 몇 년 전 이덕희와 경기를 치렀던 크리스토퍼 렁카트(인도네시아) 선수는 “그는 내가 어떤 공을 칠지 아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며 찬사를 보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복음성가 ‘나’의 작사가인 시인 송명희(55·여)씨는 중증 뇌병변장애인이다. 태어날 때 의료사고를 겪으며 뇌를 다쳐 중증장애를 입었다. 하지만 ‘작은 어려움 하나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그의 믿음은 온몸이 뒤틀리고 마비가 찾아오는 동안에도 한 글자씩 작품을 써내려 가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수많은 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물했다.

‘어려움’은 ‘약함’과 동일어도, 약함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의 시작점도 아니다. 이덕희와 송명희는 삶으로 보여준다. 어려움에 당면한 이가 실망과 절망 대신 오롯이 희망을 지향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어려움은 그 어떤 강함도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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