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기도로 깰지어다”… 기도원운동 불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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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기도로 깰지어다”… 기도원운동 불붙이다

전도사 전진과 철원 대한수도원

입력 2018-09-07 18:00 수정 2018-09-1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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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191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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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기도원운동의 효시 강원도 철원군 대한수도원 석조예배당. 1959년 완공된 이 예배당은 수도원 상징 건물로 한탄강 돌을 져다 지었다. 돌을 가장 많이 져다 날랐던 소아마비 장애인 ‘뛰뛰할아버지’는 옥양목 두루마기를 선물로 받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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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장흥교회. 철원지역 기독청년들은 해방 직후 장흥교회와 대한수도원을 중심으로 남한 지지 투쟁을 펼쳐 공산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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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서울에서 강원도 철원을 향하는 길은 비포장 신작로였다. 군에 입대한 형을 찾아 그 길을 지났다.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과 이동면을 지나는 도로였다. 당시 큰아들 첫 면회 간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신병이었던 형은 군인교회에서 위로를 받았노라 했다. 형의 손등은 동상에 걸려 거북등 갈라지듯 했고 볼 또한 동상 초기인 듯했다. 휑한 강원도 겨울 산골. 시멘트 블록 담 너머 군부대 교회 십자가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슬펐다.

지난 주말. 그 철원은 여전히 군사도시였다. 다만 차량은 한적한데 도로는 지나칠 정도로 넓고 직선화돼 있었다. 철원 대한수도원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대한수도원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수도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수도원(修道院)은 '길 도(道)' 자를 쓰지 않는다. '빌 도(禱)' 자를 사용한다. 일정한 규율 아래 공동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기도처이기 때문이다.

대한수도원 정문에 섰다. 며칠간 집중된 폭우 때문인지 풀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소나무, 돌담, 십자가의 풍경 그리고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가 순례자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수도원 내 십자가가 있는 돌담 교회로 다가갈수록 맑은 찬양이 화음을 이룬다. 적요 속에 임재를 느낀다.



결혼 실패와 중생체험, 그리고 기도원운동

한국 기독교 전래 이래 성직의 중심은 남성이었다. 여성 성직자는 목사안수를 받을 수 없었다. 지금도 보수교단은 여전히 목사안수를 하지 않는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을 자초하는 거였다. 조상의 제사를 받들지 않는 야소교는 배척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수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여성이 성직자일 경우 대중으로부터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기도원운동의 효시를 이룬 대한수도원 원장 전진 전도사는 바로 그러한 시대에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세상 멸시를 두려워하지 않은 기독교 초기 영성운동가이다. 영성운동의 거목 박형룡(1897∼1978) 유재헌(1905∼1951) 목사와 함께 기도를 통한 심령구원을 이루고자 했던 여사제 드보라와 같은 여인이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삿 5:12)의 말씀처럼 기도와 찬양으로 잠든 영혼들을 깨우려 했던 이가 전진 전도사다.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불렸다면 전진은 6·25전쟁 직후 죽음과 가난, 이데올로기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헤매는 이들의 ‘기도 어머니’였다. 한국 현대기독교의 내로라하는 중진 목회자 대개는 전진 전도사로부터 중보기도와 신앙훈련을 받지 않은 이가 드물 만큼 영적 은사가 대단했다. 특히 가부장제의 희생자 여성에게 그의 영적 각성 메시지는 강력하고 뜨거웠다.

전진은 충남 논산시 양촌면에서 전희균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전희균은 미션스쿨인 공주 영명학교와 서울 배재학당 및 협성신학교(현 감신대) 졸업 후 함경도 원산중앙교회를 중심으로 목회했다. 그 때문에 전진은 원산 루씨여학교와 협성신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루씨여학교 시절 금강산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다. 신계사라는 절에서 어떤 목사가 수양하는 것을 보고 명산 금강산에 수양관이 하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누군가 산기도 운동을 하면 나라도 잘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다”(전진 구술).

그렇게 신앙적 성숙을 이어가던 전진은 서울 이태원감리교회 논산제일교회 등에서 전도사 생활을 했다. 한데 1943년 무렵 일본군이 조선 여성을 위안부로 삼으려 하자 서둘러 결혼했다. 신사참배 강요와 ‘덴신타이’(정신대) 압박은 ‘하나님과 결혼’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어긋나게 했다.

그는 전처소생의 남매와 살고 있던 30대 후반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를 열심히 믿겠다”고 했던 남편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술 등에 빠져 지냈다. 전진은 무능한 남편 얘기를 부모에게 말도 못 하고 떨어진 벼이삭을 주워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룻과 같은 신세였다. 더구나 부부 사이에 난 아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등 이유 없이 행해지는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괴롬과 죄만 있는 이 세상…’ 찬송을 부르며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는 “출생일마저도 저주할 만큼 삶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런 남편은 해방 직후 가출했고 행방불명됐다. 전진은 남편도 전도 못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결혼 고난’은 훗날 대한수도원을 찾아온 여성들에게 상담치유자의 역할을 하는 은사가 된다.

전진은 해방 후 아버지가 한때 시무했던 원산중앙교회 전도사가 됐다. 거기서 전밀라(1908∼1985·한국 최초 여성 목사) 전도사와 심방을 다녔다. 1946년 3월 중순. 유재헌 목사는 금강산 장전교회 부흥회를 인도한 후 원산중앙교회에서 초교파 부흥회를 갖게 된다. 해방 후 첫 원산부흥집회였던 터라 만주 등에 흩어졌던 교계 지도자 등을 비롯해 원산지역 교인이 총동원됐다. 유 목사의 빼어난 영적 인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전진은 이 자리에서 중생체험을 하게 된다. 회심이었다. 그리고 유재헌 박경룡 이성해(당시 집사) 목사 등이 추진하던 수도원(기도원)운동에 동참, 결심을 하게 된다. 전진은 그들이 추진하던 철원 순담계곡 수도원 건립 선발대로 나섰다. 박경룡 목사는 회고록에서 ‘어수선한 정국과 핍박당하는 한민족, 일제의 잔학무도함 등으로 기독교인의 기도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1940년대 철원 장흥리교회(현 장흥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순담계곡의 비경이 금강산 못지않다고 보고 한반도 중앙과 다름없는 그곳에서 성령운동의 불이 일어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1945년 10월 장흥교회 교인 등과 함께 대한기도원 기도실을 짓고 설립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나라 첫 기도원이 탄생하게 됐다.

이 무렵 박경룡 목사는 남한으로, 유재헌 목사와 이성해 집사는 북한으로 기도원 건축을 위한 순회집회를 떠난다. 그 과정에서 동역자 전진을 얻게 된 것이다.

“부흥회를 통해 정성이 담긴 기도원 설립 기금이 모였다. 유 목사는 금강산 석왕사 옆에서 부흥회를 계속했다. 그 자리에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신학을 전공한 나도 눈에 보이는 일만 믿었던 터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뜨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도한 것이다. 도마와 같은 믿음을 버렸다… 유 목사는 철원의 청년들이 대한수도원 동산을 지키며 우리가 오기만 기다린다며 내게 교인들이 모아준 돈을 운반케 했다. 돈을 허리띠에 넣고, 니쿠사쿠(배낭)에는 복음성가를 넣고 길을 나섰다. 여자이기에 검문검색이 덜했다.”(당시 남한으로의 정치자금 이동이 많아 검문이 심했다, 전진 회고록 중)



“한국 영성운동사의 북방 영맥 대한수도원”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이렇게 시작된 대한수도원을 두고 “한국교회 영성운동사의 북방 영맥”이라고 규정했다. 1930년대 이세종 이현필 최흥종 강순명 등이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묵상과 노동 중심의 수도공동체인 남방 영맥을 이뤘고, 박경룡 유재헌 이성해 전진 등은 기도와 찬양 중심의 북방 영맥을 형성한 셈이다. 이 북방 영맥은 ‘불의 은혜’를 체험한 후 신비주의 부흥운동을 이끈 이용도 목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한수도원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수도원장이었던 유재헌 목사가 납북되고 박경룡 목사와 이성해 집사가 목회를 위해 도시로 나가면서 불씨가 꺼질 위기에 놓였다. 전진은 과부된 몸으로 어린 아들 최조영(훗날 목사)과 수도원 제단을 지켰다. 그 깊은 계곡에서 홀로 남아 1960∼90년대 ‘성령 불의 은혜’가 타오르게 했다. 병고침의 은사 등이 알려지면서 그 깊은 산속까지 사람들이 몰렸다. 또한 그는 강원도 북부에 교회 개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한수도원에는 숱한 사람이 몰린다. 건강과 가정문제, 사업문제, 신앙적 갈등 등으로 응답받기 원하는 이들이 수도원 내 ‘회개바위’를 찾는다. 회개바위는 순담계곡 청록빛 물결을 밑에 두고 여전히 그대로 있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기도굴도 그대로다. 신앙 선대의 자리에 후대가 무릎 꿇게 만드는 곳이다.

대한수도원의 자연은 하나님의 신비 체험 장소로 유명하다. ‘신비’의 비밀은 각자마다 다르다. 다만 기도가 비밀을 푸는 열쇠라는 건 분명하다.



▒ 민족지도자들이 시무한 철원 장흥교회는 순례 코스

철원 장흥교회는 대한수도원과 함께 지금도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920년 시작된 이 교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신석구 서기훈 명관조 박경룡 목사 등 교계 민족지도자들이 시무한 곳이기도 하다. 철원지역 ‘신한애국청년회’ 사건은 기독교 청년운동의 대표적 사건이다. 1946년 이승만 김구 합작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건국을 준비하면서 북강원도 도청이 있던 철원에 국민회 비밀결사조직을 꾸렸다. 국민회는 상해 임시정부 상임이사를 지낸 김병조 목사의 아들 김윤옥 목사를 지부장으로 파견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장흥교회와 대한수도원 등 철원지역 기독청년들이 신한애국청년회라는 이름으로 ‘김일성 타도하자, 형제여 통일을 이루자’라고 외치며 무장투쟁을 벌이게 됐다. 당시 철원은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분단됨에 따라 이북 지역에 속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3개월 만에 발각돼 40여명이 체포됐고 그중 김윤옥 목사, 박성배 장로 등이 고문 등으로 숨졌다.



철원=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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