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칸타타] “편견이 없는 그리스도인 양육하는 것이 나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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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칸타타] “편견이 없는 그리스도인 양육하는 것이 나의 소명”

‘기다리는’ 기독교교육학자 전 호서대 연합신학전문대학원장 한미라 교수

입력 2018-11-0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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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에서 만난 한미라 교수는 “편견이 없는 크리스천을 양육하는 것이 내 소명”이라고 말했다. 송지수 인턴기자
한미라 교수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바른 품성을 가르치는 기독교 교육학자로서 그는 자신이 지녀야 할 첫 번째 미덕으로 기다림을 꼽는다.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이 가르침을 이해할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지 않으셨던가. 비록 배움이 더딜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 스스로 깨닫고 공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어진 감동이 있어야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을 준비가 됐다고 믿는다.

그는 평생 편견에 맞섰다. 그에게 세상은 차별로 가득한 곳이었다. 집과 교실, 캠퍼스와 사회, 심지어 교단과 교회에서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가난하거나 약하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교수는 올바른 크리스천이라면 우리 모두 주 안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런 크리스천을 양육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여긴다.

장녀와 닭다리

지난 6월 호서대 연합신학전문대학원장직을 내려놓고 정년을 앞두고 있는 한 교수를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그는 여성으로서 자신 또한 차별과 편견에 시달렸다고 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차별이라는 거대한 세상의 굴레를 받아들이고 순응했겠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다섯 남매 중 맏딸이었다. 어머니가 백숙을 하는 날엔 닭다리는 아버지와 아들에게만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릴 땐 닭다리가 애들 머릿수대로 다섯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지금처럼 닭다리를 따로 팔지도 않았으니 닭을 삶으면 다리는 아버지와 남자형제에게만 배정됐어요. ‘내가 누나인데 먼저 달라’고 떼를 쓰거나 단식 투쟁을 해도 소용없었죠.”

우스갯소리처럼 말을 했지만 ‘닭다리 차별’은 그를 단단하게 만들고 성장시켰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치열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실력이 뛰어나면 딸로 태어나 받지 못한 특혜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사생대회든 음악대회든 공부든 웅변이든 언제나 최우수 성적을 받아왔다. 그렇게 자기계발의 명수가 됐다. 하지만 어딜 가나 여성과 약자를 깔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에는 남자 동기생이 여학생은 나이가 같아도 남학생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유학생 시절에는 한국인 남학생이 제 방에 왔다가 베네수엘라 룸메이트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 간 적도 있었죠.”

대학에선 목사가 아닌 권사가 목사 후보들을 가르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그래서 교수직을 내려놓고 하버드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신학을 공부했다. 2002년 초교파 신학대학원연합체인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원협의회 공동안수위원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렇게 정식 목회자가 됐는데도 일부 교단에선 여전히 여성이라고 차별했다. 어느 교단에선 여성은 축도를 할 수 없고 설교만 할 수 있다고 했다. 강연료도 다른 남성 목사에 비해 적었다.

한 교수는 갈라디아서 3장 28절 ‘이제는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을 외웠다. 이 말씀이 삶의 지표라고 했다.

“저는 언제나 개척하는 사람이었어요. 집안에서부터 대학과 유학시절은 물론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모든 차별에 맞서야 했죠.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극복할까를 항상 생각했죠. 힘은 들어도 행복했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시겠지’를 믿고 앞만 보고 달렸으니까요.”

덤으로 사는 인생, 물질을 버리다

그는 두 번의 사고를 겪고 하나님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모두 교통사고였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미국 뉴욕 버펄로에 있는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박사 공부를 할 때 첫 번째 사고를 당했다. 1982년 2월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오대호 중 하나인 이리(Erie) 호수 근처 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가 결빙된 도로에서 미끄러졌다. 차가 빙글빙글 돌더니 가는 길과 정반대 방향 길 옆 눈밭으로 추락했다. 핸들에서 손을 떼고 마지막 감사 기도를 드렸을 정도로 위급했다.

그런데 전혀 다치지 않았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가까스로 헤치고 나와 천신만고 끝에 구조됐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Sola Fide, Sola Gratia’(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를 수도 없이 외쳤다. 그날 밤 그는 코트도 벗지 못한 채 화석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에 빠졌다. 밤을 꼬박 새우며 “이 시간 이후로 제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입니다”라고 약속했다.

두 번째 사고도 비슷했다. 이번엔 98년 6월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을 주행하다 차가 수막현상으로 미끄러졌다. 차는 가드레일과 중앙분리대를 충돌한 뒤 멈췄다. 차가 폐차될 정도로 심각한 사고였는데 한 교수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죽을 뻔한 사고를 두 번이나 겪고도 멀쩡히 살아남았어요. 그때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모든 물질주의와 결별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욕심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91년 하버드 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 돌아온 뒤 94년부터 호서대에서 기독교교육을 가르치면서 호서대에만 2억원 넘는 장학금을 기부했다. 또 본인이 설립한 한국기독교교육정보학회와 기독교 시민단체·언론 등에도 꾸준히 지원금을 보냈다. 학교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통학비를 주거나 일자리를 주선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한 교수에게 크리스천이 지켜야 할 삶의 키워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믿음의 수련과 봉사를 들었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뿌리며 강요하는 대신 크리스천 개개인이 신앙을 수련하고 묵묵히 봉사하면서 성결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전도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만이 성취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난 왜 목사가 됐을까. 왜 박사가 됐고 교수가 됐을까 하고 말이죠. 대답은 간단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저부터 모든 인간은 주 안에서 평등하다는 걸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요. 편견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걸 말이죠. 제 제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은혜를 베푼 것처럼 인간이 모두 공평하다는 걸 알길 소망합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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