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이재민 동네에 지핀 복음의 불 응답하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이재민 동네에 지핀 복음의 불 응답하다

애국자 박현숙 장로와 서울 쌍문동 갈릴리교회

입력 2018-11-02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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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1896∼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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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대예배 후 전도에 나선 갈릴리교회 교인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서울 쌍문동 골목길을 걷고 있다. 골목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북한산이다. 쌍문동 골목길은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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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였던 박현숙(오른쪽)은 정부 수립 후 장관·국회의원 등을 역임한다. 가운데 인물은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이자 월남 후 제헌의원, 국무총리 서리 등을 지낸 이윤영 목사다. 어느 행사장에서 태극기에 대한 의례 자세다(위 사진). 2016년 박현숙 장로의 손녀 김덕신 권사(남산교회·왼쪽)가 갈릴리교회 김영복 목사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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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갈릴리교회. 창현교회(박현숙장로기념예배당)였으나 1982년 명칭을 바꿨다(위 사진). 현 갈릴리교회 모습. ‘쌍문동 208번지’로 불리던 이곳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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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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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 갈릴리교회 교인들은 겸손하고 친절했다. 서로가 깍듯이 인사했으며 낯선 이에게도 환한 얼굴로 안내했다.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이 험해지고 파편화되면서 교회공동체도 언제부터인가 낯선 이에게 선뜻 인사하지 않는 분위기가 됐다. 갈릴리교회 사람들에게선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인기드라마 ‘응답하라 1988’ 무대 쌍문동 갈릴리교회 골목으로 들어서니 골목 저 끝으로 북한산 백운대가 구름에 싸여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가을비가 내렸고 우박이 쏟아지기도 한 날이었다.

“쌍문동은 드라마 ‘…1988’에서 봤던 내용 그대로 이웃 간의 정이 지금도 여전한 곳입니다. 작은 거라도 나누려 해요. 교인들도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동네 사람들로서 서로 챙기죠. 주인과 셋방 사람들이 가족과 다름없이 지내요.”

갈릴리교회 김영복 목사가 이같이 얘기했다. 목사실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어느 교인이 동생이 건강식품 농장을 한다면서 박스 하나를 두고 나갔다.

갈릴리교회의 옛 주소는 ‘쌍문동 208번지’이다. 1968년 교회가 성립됐고 그 자리를 지금도 지키고 있다. 50년 짧은 역사의 교회지만 한국현대사 속의 교회 역할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화재 이재민들을 위해 공동묘지에 세워진 교회

갈릴리교회는 독립운동가 박현숙(1896∼1980) 장로, 그리고 그와 동역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눈물이 담긴 성전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투쟁을 벌이고, 해방을 맞고, 남북이 갈리고, 전쟁을 겪는 고난 중에 우리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백성을 위한 처소. 교회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늘 위로의 공간으로 남았다.

갈릴리교회 옛 이름은 창현교회이다. 1982년 지금의 갈릴리교회로 개명했다. 1960년대 말 쌍문동 일대는 창동으로 불렸고, 이 창동의 ‘창’과 박현숙의 ‘현’을 따서 창현교회가 됐다. 초기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일자리를 챙겨주고 예배당을 세워준 박 장로가 정말 감사해 ‘박현숙장로기념예배당’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 지금의 쌍문동. 경기도 양주와 의정부 쪽에서 한강을 향해 흐르는 중랑천 모래사장을 낀 가난한 동네가 쌍문동이었다. 서울로 몰려든 이농자들이 중랑천과 그 지류 방학천 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이농자들은 날품팔이를 하는 도시 빈민이 됐다.

‘쌍문동 208번지’ 일대는 공동묘지였다. 무작정 상경한 이들은 묘지 위에 얼기설기 집을 지었다.

그 무렵 서울 사대문 안 회현동 남산교회(현 서울 반포동 위치). 지금의 남산3호터널 북측 입구에 자리한 교회로 평양 최초의 감리교회 남산현교회(1893년 설립)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1945년 12월 설립했다. 북한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교인들이 남산현교회 이윤영 목사 등과 함께 일본인이 버리고 간 욱정교회를 인수해 새 출발했다.

박현숙은 이 교회 장로였다. 평양 출신 신여성이었던 그는 노블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미션스쿨 숭의여학교(현 숭의여전)를 졸업했다. 그는 여학교 시절 한국 최초 여성비밀결사단체인 송죽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십자가 고난에 동참했다.

그 후 송죽회 회장으로 3·1운동에 참여,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출옥해서도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 때문에 다시 붙잡혀 옥에 갇혔다. 3·1운동 때는 남산현교회에서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가두 진출해 평양의 그리스도인들과 만세를 불렀다. 일경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대한의 애국청년 끓는 피가 뜨거워’라는 ‘혈성가’를 부르던 항일 기독청년이었다. 일제강점기 그는 세 차례나 투옥됐다.

그는 해방 후 조만식 선생과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구소련의 압박이 심해지자 월남해 서울에 송죽원이란 고아원을 세웠다(이후의 삶 연보 참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신앙인이었다.

1967년 1월 18일 밤 서울 남산동2가 판자촌에서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다. 지금의 숭의여대 건너편 남산케이블카 매표소 인접 동네였다. 당시 무작정 상경한 이농자들은 빈터만 있으면 집을 짓고 살았고 남산동2가에도 공사가 중단된 ‘유엔호텔’ 부지 6611㎡ 안에서 46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소방차 진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이 화재로 30여명이 죽고 3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신문은 호외를 발행해 참사를 보도했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위로 방문했다. 그곳 이재민 가운데는 한국노동운동사의 인물 전태일(1948∼1970) 열사 가족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1929∼2011·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장) 여사가 가족을 먹여 살리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훗날 이소선은 남산 화재 회고를 통해 “이재민 수용소인 남산초등학교에서 구호품으로 온 라면이라는 걸 생전 처음 먹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은 카바레 직원, 이발사 등 가난한 이들이 주로 이재민 성금을 냈다고 보도했다.

이때 남산교회 교인들도 이들을 도왔다. 동네 화재였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박 장로 또한 물심양면으로 이재민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을 내놓았다.

그런데 정부와 서울시가 이재민들을 도심 외곽으로 내쫓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 창동과 신림동이 대상지였다. 생계위협을 받은 판자촌 사람들은 남산초교를 본거지로 극렬히 저항했으나 정부는 수도경비사 트럭까지 동원해 강제 이주시켰다. 이재민들은 “창동이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중상자가 속출했다.

이들은 창동의 중랑천과 방학천 백사장에 버려졌다. 그리고 이재민 가정마다 천막 한 채가 주어졌다. 이소선은 “바닥에 물이 흥건해 돌을 받치고 살아야 했다”고 증언했다. 적잖은 이재민 교인들도 엄동설한에 내몰려 천막생활을 했다.

그때 박 장로와 전진(1912∼1996·철원 대한수도원장) 전도사 등이 나서 이재민들을 위로코자 천막교회를 개천가에 세웠다. 이들은 이재민을 향해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을 뵙자”고 외쳤다. 혹독한 겨울이었으나 병자가 일어서는 치유 은사가 일어나면서 사람이 몰려 천막교회가 비좁게 됐다.

쌍문동 208번지, 고통과 불운이 복이 되다

이때 박 장로가 교회 건축 기금을 쾌척했다. 그 기금으로 ‘쌍문동 208번지’에 오늘날 갈릴리교회가 세워졌다. 이재민 이소선과 그의 아들 전태일도 갈릴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건준위원, 장관과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박현숙 장로. 그는 이재민과 같은 가난한 이들에게 요셉과 같은 사람이었다. 인간의 고통과 불운이 하나님을 통해 복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2016년 2월 14일 갈릴리교회 주일예배에서 박 장로의 손녀 김덕신(75) 남산교회 권사가 김영복 목사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박 장로를 대신해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김덕신은 정치가 정일형·법률가 이태형의 며느리이자 정치가 정대철 아내이다. 아버지 김성업도 어머니처럼 독립운동가이다. 두 가문 사람들은 크리스천 리더로서 늘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고자 했다.

갈릴리교회는 이러한 현대사의 맥락에서 세워진 신앙공동체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주는 ‘좋은이웃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교회 현관 ‘도봉구민간복지거점기관’ ‘갈릴리작은도서관 옹달샘’ 등의 팻말은 요셉과 같은 믿음을 실천한 박 장로의 정신을 반영한 곳이다.

박 장로는 갈릴리교회 외에도 철원 신흥교회 등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기도원운동을 통해 영적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정치가 사회복지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로 열성을 다했다.

김영복 목사는 “박 장로님은 우리 교회 설립자이기 전에 한국현대사의 인물이자 한국교회 헌신자인데 그 공로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며 “박 장로님의 눈물의 기도로 세워진 교회는 앞으로도 선대 신앙인의 유업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했다.

쌍문동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교회는 유일한 희망·안식처였다

1970년 11월 서울 쌍문동 208번지 창현교회(현 갈릴리교회)에서는 노동운동가이자 이 교회 교인이었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사진)의 장례예배가 열렸다. 누구보다 사람과 예수를 사랑했던 전태일 형제라며 사람들이 흐느꼈다.

전태일은 남산 화재 이재민으로 쌍문동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에게 교회는 유일한 희망이자 안식처였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충격적 죽음을 신앙으로 극복했고 훗날 이 교회 권사가 됐다.

전태일은 그해 11월 13일 서울 청계천6가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로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린 여공들이 밥을 굶으면 차비로 풀빵을 사다주고 쌍문동 집까지 2∼3시간을 걸어 다녔다. 그의 죽음으로 한국 노동자의 현실은 크게 개선됐다. 그가 죽고 교회와 집이 있던 쌍문동 208번지는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가 됐다.

갈릴리교회는 박현숙·전태일의 삶과 신앙을 아카이브화하는 등 사료 정리에 나서고 있다.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약력

·1915년 송죽결사대 조직 항일운동
·1915∼17년 전주 기전여학교·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1919년 3·1운동 주도 수감생활
·1921년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관련 수감생활
·1927년 평양YWCA 회장
·1941년 세계기도일 문제로 반전혐의 체포 수감
·1943∼45년 기감 전국여선교회장
·1945년 건국준비위원
·1946년 고아원 송죽원 설립
·1948년 대한민국정부 감찰위원
·1952년 무임소 장관·대한부인회 총재·남산교회 장로 임직
·1953년 서울 숭의학원 재건설립자 및 초대이사장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1964년 국가조찬기도회 창설회장
·1966년 대통령조찬기도회 창설회장
·1969년 3·1여성동지회장
·1980년 건국포장·소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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