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권력이 합리성을 잃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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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칼럼] 권력이 합리성을 잃으면

입력 2018-11-07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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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세습은 부패의 전초 ‘목구멍’ 대응은 품격 문제… 여권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본다
권력 내 견제와 균형 기능이 소멸되면 합리성은 사라지고 오만이 남는다 촛불의 분노는 그래서 시작됐었다


최근 들어 정권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조짐들을 본다. 그런 조짐들은 진보 보수의 문제도 아니고, 정책의 문제도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고, 품격이나 대응 방식에 관한 문제다. 그래서 분노의 감정에 불을 지를지도 모를 문제다. 그런데 여권은 애써 축소하거나, 본질을 피해간다. 딱한 수준의 변명까지 한다. 상황 관리를 이다지도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울교통공사의 고용세습은 아직은 의혹 수준이니 조사해 봐야 알고,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여권 핵심인사들과 민주노총 사람들이 있다. 정황으로 봐 청년들이 분노할 만큼의 불공정행위가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건 아주 질 나쁜 범죄행위이고 조직적 부패의 전초다. 민노총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대도 거절할 만큼 위세를 떨친다. 대통령의 1호 정책도 그들이 요구해 왔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이다. 우리 사회가 일자리로 고통 받고 있는 사이 1호 정책을 등에 업고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일부의 일탈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청년들 등에 칼 꽂는 행위가 조직적으로, 음습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이 면책되진 않는다. 어디 거기뿐이겠는가. 과연 기회는 평등했나. 과정은 공정했나. 결과는 정의로웠나. 그런데도 우리가 가는 길이 옳으니 일부의 일탈 정도는 틀어막겠다는 분위기가 읽힌다. 사립유치원 비리 의혹에는 관련 장관은 물론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까지 나섰다.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목구멍 폭언’에 대한 여권 대응은 참으로 딱하다. 경위야 어찌 됐든 그의 말은 무례하기 짝이 없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부터 리선권의 언동은 우리를 자극했다. 협상 기술인지는 몰라도 재벌 총수, 장관, 여당 인사 등을 향해 그런 역할을 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의도적으로 하대하고 깔봤다. 한데 여당 고위인사들의 해명성 발언에 이어 급기야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는 공식 발언까지 했다.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해괴한 대응이다. 이게 청와대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해명해줘야 할 일인가. 비슷한 급의 우리측 인사가 “그 사람 원래 생긴 대로 상스럽게 말하는 사람 아니요?” 정도의 맞받아치기만 했으면 끝날 일 아닌가. 북한 문제만 나오면 왜 이토록 비루해지는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참담함을 느끼게 한다.

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경제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말을 분명히 했다. 포용적 성장이 양극화를 극복해보려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는 하다. 그런데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은 역효과를 내고 있다. 좋은 정책이라도 실행 능력이 없거나, 조건 미비로 작동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선의가 좋은 결과를 담보하지도 않는다. 대북정책에 후한 점수를 주는 합리적 보수층도 이 정권의 경제운용 능력에는 싸늘하게 반응한다. “소득주도성장·혁신성장·공정경제 중심의 정책 기조가 계속돼야 한다” “세계가 우리의 경제성장에 찬탄을 보낸다”라고 굳이 표현해야 했을까. 가뜩이나 화나 있는 경제주체들과 시장을 향해 말이다. 설사 정책기조를 바꿀 생각이 없더라도 시장이 좀 유연성을 느끼고 반응하게끔 대통령이 신호를 줄 수는 없었을까. 청와대의 경직성을 본다.

고용세습을 비판하니 ‘그럼 정규직화 하지 말라는 얘기냐’는 프레임으로 받아치고, 북한에 저자세라고 하니 극우세력의 반발이라고 한다. 수단에 불과한 소득주도성장은 신성한 목적이 돼버렸다. 이런 비판을 오로지 보수 반동과 수구세력의 반격으로 보는 모양이다. 집권 2년차, 이런 심상치 않은 조짐을 곳곳에서 목격한다. 여기저기서 무능력, 독선이란 단어가 회자된다. 물론 반대세력의 묻지마 공격도 있다. 정권을 운용할 정도면 그런 저질의 정치공세와 견제와 균형 차원의 비판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정권 내부 어디에선가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게 없다면 정말 가망이 없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바꾸는 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자신의 능력이나 방법을 지나치게 믿어 우상화의 오류를 범해 결국에는 실패하기 쉽다고 봤다. 그런 오만을 휴브리스(Hubris)라 규정했다. 1980년대 운동권의 ‘구국의 강철대오’가 30여년 뒤 성공신화를 쓰면서 휴브리스에 빠진 건가. 그때는 정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촛불혁명은 비정상적인 대통령의 행태와 비상식적인 추종세력에 분노가 터진 것이다. 그 분노의 본질에는 정치적 진영이 없었다. 그것을 확대하고 조직화한 정치세력은 있었지만, 합리성을 배반한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였다. 권력이 합리성을 잃으면 그렇게 된다. 그런 합리성은 내부의 견제와 균형 기능이 지켜준다.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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