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제민] ‘국가부도의 날’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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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이제민] ‘국가부도의 날’ 단상

입력 2018-12-06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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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는 한국 자본시장 개방 노린 월가와 미 정부의 합작품
그 유착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外資 끌어들인 재벌개혁 시도 후유증 커
위기 배경과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1997년 외환위기는 아무래도 잊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래서 21년이 지난 지금 ‘국가 부도의 날’이라는 영화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 한국인의 인식이 외환위기 당시에 비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인 대다수는 “이번 위기는 위장된 축복이 될 것”이라는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말을 믿고 있었지만, 영화에 나타나는 현재 한국인의 인식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외환위기의 원인은 다루지 않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엔 케리 트레이드’ 청산이다. 일본의 금리가 한국보다 엄청 싸서 한국의 은행들이 일본 은행들로부터 대거 단기자금을 빌렸는데, 일본 은행들이 자국 내에서의 금융위기로 자금을 갑자기 회수했던 것이다. 그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은행의 외채에 대해 지불 보증을 서고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유동성을 제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미국이 일본에 유동성을 제공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이 유동성을 제공하면 도덕적 해이를 척결할 수 없다는 근거를 내세우고 한국을 IMF로 끌고 갔다. 그러나 도덕적 해이 척결이라는 근거는 핑계에 불과했다. 그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월가의 명백한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고 그냥 수천억 달러를 제공했던 것이다.

미국은 왜 한국을 IMF로 끌고 갔는가. 그전에 반복적으로 요구해도 한국이 들어주지 않았던 자본시장 개방을 실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월가와 유착한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놓여 있었다. 1997년 위기와 2008년 위기 때 미국 정부가 보인 행태의 바탕에는 바로 그런 미국식 정경유착 구조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미국은 냉전 종식 후 구 공산권의 경제체제를 해체한 것처럼 동아시아 식 경제체제도 해체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힘도 없는데 맞서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현실론으로 IMF의 요구를 받아들인 게 아니다. 한국의 지도층은 “차라리 잘 됐으니 이참에 개혁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IMF의 구조 개혁 요구가 위기 전 한국이 스스로 하려고 했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IMF 요구에서 몇 걸음이나 더 나가는 급격한 구조 개혁을 했다.

그 결과 선진국과 비슷한 제도가 도입되고 사회 전체의 투명성이 올라갔다. 그러나 경제의 성과는 나빠졌다. 무엇보다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것은 경제발전에 따른 자연적 하락보다 더 떨어진 것이다. 위기 후 자산을 대규모로 외자에 투매함으로써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국부’가 유출됐다.

2008년에 외환위기가 재발한 데서 보는 것처럼 경제의 안정성이 올라갔다고 보기도 어렵다. 일자리는 모자라고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노동소득분배율이 떨어져서 분배가 악화됐다. 출산율이 크게 떨어진 데다 대학의 이공계가 초토화되고 두뇌 유출이 재개되어서 장기적 성장잠재력도 약화됐다.

일반 국민은 혼선을 겪었다. 처음에는 위장된 축복이 될 것이라는 말을 믿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반대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 외자에 대한 태도 변화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외자를 열렬히 환영했지만 점차 반 외자 정서가 지배하게 되었다. 외환위기의 성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뀐 한국인의 인식이 국가부도의 날 영화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1997년 IMF 하에서 개혁하려고 했던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 경제의 뿌리 깊은 문제는 1997년 위기 후 구조 개혁으로 일격에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정경유착 관치금융 재벌체제로 요약되는 문제다. 그중에서도 재벌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개혁은 외환위기의 성격과 결과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당시의 대응 방식이 잘못됐다는 데 대해 반성하는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재벌 개혁이 중요하다고 외자와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1997년 당시 한국은 “이참에 개혁하자”는 생각으로 외자를 끌어들여 재벌을 개혁하려 했지만, 배경과 맥락을 무시한 그런 개혁은 부정적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을 IMF로 끌고 가서 외환위기 후 나타난 모든 문제의 조건을 마련한 월가와 미국 정부의 유착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 다시 한국이 그런 문제를 간과한다면 일반 국민이 처음 외자를 환영하던 데서 반 외자 정서로 돌아서는 패턴을 반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가부도의 날 영화에 나타나는 한국인의 인식 변화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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