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문 대통령이 노 저을 때다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문 대통령이 노 저을 때다

입력 2018-12-18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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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력 없는 정치적 합의는 깨질 가능성이 많다.
의지 약한 거대 양당에선 이런저런 이유로 딴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역주의 기댄 독과점 정치 구조 타파는 가장 중요하고 선한 정치 행위…
대통령 강조한 선거제 개혁에 물이 들어온다


꿈쩍 않던 선거제도 개혁이 겨우 첫걸음을 뗐다. 굳이 ‘겨우 첫걸음’이라는 표현을 끌어다 쓴 건 자기를 내던진 단식도, 원내대표 간 합의도 국회의원 밥그릇을 건드리거나 기득권 축소에 영향을 미친다면 성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게다가 합의문을 들여다보니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지금까지 거대 양당의 태도를 감안하면 단식 중단과 정국 파행 회피를 위해 어설프게 미봉했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나 다를까.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검토만 합의했을 뿐’ 같은 딴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러니 진정한 의지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건 합리적이다.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일단 의미는 있겠다.

그런데 어쩌랴. 합의문엔 구속력이 없다. ‘도입을 위한 적극 검토’ 또는 ‘정개특위 합의를 따른다’로 돼 있다. 막말로 안 하면 그뿐이다. 거센 비난만 며칠 버티면 정국은 또 다른 현안에 묻힌다. 내각제 각서나 대선 후보들의 개헌 약속 같은 큰 것부터 자잘한 정국 현안 해결용까지 지켜진 것보다 휴지조각이 된 정치적 합의가 훨씬 더 많다. 국회 사무처에 원대대표 간 합의문서가 보존돼 있다면 아마 가관일 게다. 합의가 깨진 이유는 항상 있다. 대개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이거나(이것도 주관적 해석을 토대로 한다),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새 제안을 낸 다음에 깨는 것이다. 여의도밥 몇 년 먹으면 합의를 깨기 위해 그럴듯한 정치적 논리를 개발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합의문엔 암초들이 곳곳에 있다. 의원 정수 확대 여부, 지역구 의원 선출 방식, 비례·지역구 의석 비율, 석패율제 도입 등이다. 가만히 보면 합의하지 않으려고 이 조항들을 넣어놓은 것 같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역시 관건은 의원 정수 확대와 일부 지역구 조정에 관한 것이다. 철밥통 문제이고, 다음 총선 결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다. 이게 원만하게 합의되면 선거제도 개편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워낙 명분 있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개혁이기 때문이다.

우선 비례 의원 정수 확대. 국회의원 신뢰도는 늘 꼴찌다. 의원 수 늘리는 건 여론 반대가 너무 심하다. 그나마 여론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국회 예산과 세비 삭감(동결이 아니다), 일부 특권 폐지를 실행하는 거다. 삭감 후 1~2년 뒤에 슬쩍 올리는 꼼수를 막기 위해 일정 기간 증액을 불허하는 구속력 있는 조치도 있어야 한다. 국회의원을 10% 늘릴 거면 국회 예산 10% 삭감, 20% 늘릴 거면 20% 삭감하는 방안도 있다. 마침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주장하고,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등이 지지를 보태고 있다. 이번 기회에 연동형의 취지에 맞게 지역구 조정도 하는 게 좋겠다. 5당은 시한을 정해 합의하지 못할 경우 중앙선관위 안대로 간다는 약속도 하라.

장애 요인을 해소하고 추동력을 얻기 위해선 문재인 대통령과 다선 의원들이 적극 나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마 거대 양당은 의원 늘리기는 국민이 반대하고, 지역구 줄이기는 의원들이 거세게 저항하니 어쩔 수 없다며 소극적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많다. 이를 방관한다면 대통령이나 여당이 말로만 그랬지 애당초 할 의사가 없었거나, 결과적으로 비겁한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합의에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일을 되게끔 하려는 문 의장의 노련하고도 훌륭한 중재였다. 문 의장과 함께 거대 양당의 다선 의원들, 특히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무성 자유한국당 전 대표 같은 이들이 나서야 한다. 앞으로 정치를 하면 얼마나 더 하겠는가. 망국적 지역주의에 기반하고, 독과점 정치구조를 공고히 하며, 의원 개개인의 한심한 지역구 이기주의만 확대시키는 이 제도를 자기 정파에 유리하다고, 자기가 거느리는 의원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

협상에 가속도가 붙으면 문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이전부터 선거제도 개편을 여러 번 강조했다. 대통령은 민주당의 등을 밀고, 한국당의 손을 잡고 이끌어내야 한다. 대통령이 개입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그렇지 않다. 대통령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다. 이 개혁은 정파보다는 나라와 정치를 위한 지극히 선한, 답이 나와 있는 정치 행위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여야 정치인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뤄 결국 노예제도 폐기를 이끌어냈다. 윈스턴 처칠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국내 정파와 미국·프랑스를 다독여 자유진영의 승리를 안겨줬다. 결과를 낸 것이다.

지역에 기댄 독과점 정치구조가 조금이라도 타파된다면 우리 정치 현실에서 이 이상 선한 명분은 없다. 합의해오면 지지한다는 의견은 너무 소극적이다. 한가하기까지 하다. 문 대통령은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다. 지금 개헌보다 더 중요하다는 선거제도 개혁에 물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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