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권혜숙] 쌍방향이라는 착각

국민일보

[데스크시각-권혜숙] 쌍방향이라는 착각

입력 2019-01-10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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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내내 이 영화를 돌려보고 또 돌려봤다. 넷플릭스가 ‘인터랙티브(쌍방향) 영화’를 표방하며 내놓은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얘기다. 영화를 보다가 화면에 A와 B, 두 가지 선택지가 나올 때 자신이 원하는 걸 고르면 그에 따라 전개가 달라진다는 소개말에 혹한 게 발단이었다.

영화는 10대 프로그래머 스테판이 ‘밴더스내치’라는 소설을 게임으로 만들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시작은 가볍다. 아버지가 두 개의 시리얼 상자를 들어 보이며 묻는다. “아침으로 뭘 먹을래?” 모니터 하단에 뜬 선택 메시지 중에 익숙한 브랜드 것을 누르자, 아버지가 식탁 위에 그 제품을 내려놓는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어떤 노래를 들을지, 정신과 의사에게 트라우마를 털어놓을 것인지 같은 선택이 이어지다가 점점 심각해진다. 누가 고층건물에서 투신할 것인가를 고르게 되고, 갈등 끝에 아버지를 죽이느냐 마느냐를 선택하게 된다.

수많은 결정을 내리며 스테판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우쭐함에 젖어들 때쯤 대뜸 그가 화면 밖의 나를 향해 소리 지른다.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누구야? 누가 있는 거 아니까 당장 신호를 보내!” 때마침 뜬 선택지를 통해 스테판의 컴퓨터 모니터에 “넷플릭스로 너를 보고 있어. 결정은 내가 내리지”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쯤 되면 영화 속 주인공과 내가 양방향 대화를 나눈다는 짜릿함마저 맛보게 된다.

뭘 고르느냐에 따라 영화는 40분짜리도 되고 5시간짜리도 된다더니, 다른 선택지를 눌렀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흐를까 궁금증이 생겨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인터넷에는 각각의 선택에 따라 어떤 스토리로 이어지는지를 알려주는 ‘밴더스내치 흐름 전개도’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즐거움은 길지 않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와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무실로 출근해서 일하라는 게임회사 대표의 제안에 ‘수락’을 누르면 다른 등장인물이 “잘못된 길을 택했네”라고 말하고, 영화는 저절로 맨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는다’를 선택해도 결국 여러 선택지를 돌고 돌아 아버지를 죽게 하는 내용에 다다르게 된다. 스테판은 내가 그를 마음대로 조종한다고 하지만 나 역시 제작진이 짜놓은 내러티브 안에 갇힌, 스테판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인 것이다. “(게임에서) 자유가 많다는 착각만 줄 뿐이지, 내가 다 결정해요.” 자신이 개발한 게임을 설명하던 스테판의 목소리가 제작진의 그것과 겹쳐지는 듯하다.

과정은 쌍방향이지만 정해놓은 몇 개의 결말로 시청자를 몰아가니, 완전한 인터랙티브는 아니다. 시청자에게 자신이 선택했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착각을 불어넣는 ‘통제의 환상(illusion of control)’을 노린 셈이다. 자신이 결정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만족도가 높아지고, 지루한 상황도 잘 견디게 된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그래서 영화는 아직 배부르기에는 먼 인터랙티브 영화의 첫술쯤 되겠다. 하긴 소통을 ‘소리치면 통한다’로 알고 있는 갑들의 세상이고, 마주 앉은 사람과도 양방향 대화가 어려운 시대에 영화에게 나와 제대로 상호작용을 해주기를 주문하는 건 무리일 테다. 영국의 유력지 가디언은 이 영화 리뷰에 ‘미래의 TV가 도래하다’라는 제목을 달고 별 5개 만점에 4개를 매겼다. 개인적인 의견은 스테판이 개발한 게임을 평가한 TV 게임방송 진행자의 대사로 대신한다. “별 5점 만점에 2.5개 줄게요. 죽도록 궁금하다면 해보세요.”

그나저나 영화에서 스테판이 존경하는 천재 게임 개발자 역을 맡았던 배우는 영화가 공개된 후 너무 못생겼다는 악플이 쏟아지는 바람에 SNS 계정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쌍방향 소통의 장이라는 SNS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이 시대의 ‘인터랙티브’란 결국 이런 것인가.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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