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만남-엘렌 로스 사모] 스물다섯부터 60년… 한국 선교의 여정을 그리다

국민일보

[저자와의 만남-엘렌 로스 사모] 스물다섯부터 60년… 한국 선교의 여정을 그리다

'기쁨의 여정’ 쓴 엘렌 로스 사모

입력 2019-01-11 00:24 수정 2019-01-2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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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여정’을 쓴 엘렌 로스 사모가 지난 8일 서울 서초구 규장출판사에서 인터뷰를 갖고 한국 선교사로 활동한 그동안의 세월을 회고하고 있다.송지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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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신간 '기쁨의 여정' 저자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서초구 규장출판사를 찾았다. 자기 이름보다 한국 ‘예수전도단’ 설립자 데이비드 로스(오대원) 목사의 아내로 더 많이 불렸던 엘렌 로스. 앞에 앉아 있는 그는 팔순을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소녀처럼 맑고 환한 얼굴이었다.

그는 25세 되던 1961년 8월, 남편과 함께 종신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한국을 찾았다. 항공료가 너무 비싸 샌프란시스코항에서 화물선 초크타우를 탔다. 배가 고장으로 이틀간 공해상에 멈춰서는 위기 끝에 20여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시작하는 삶, 두렵지 않았을까.

“배에서 내리던 날,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이 늦었어요. 그때 조금 무서웠어요. 하지만 숙소에 도착한 뒤 선배 선교사들이 우리가 잘 적응하도록 도와줬어요. 특히 이화여대 학생들이 와서 함께 지내도록 배려해 줬어요. 한국 사람들 머리 색깔도 똑같고 얼굴이 비슷하니까 개인적으로 인사 나눠도 다음에 만나면 잊어버릴까 봐 걱정했는데, 학생들과 영어로 이야기 나누고 웃으면서 처음 느꼈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너무 미안할 정도로, 그때부터 안정됐어요.(웃음)”

그는 처음 선교사 공동체에서 지낸 뒤 한국인 가정에서 8개월간 지냈다. 당시 오복균 장로가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 사람들은 데이비드 목사의 오대원이라는 이름은 잘 기억하지만, 엘렌 사모에게 ‘오성애’라는 한국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그런 면에서 지난 60년간 한국을 위한 다양한 사역과 부부가 걸어온 길을, 엘렌 사모가 자신의 시선과 마음으로 정리한 이번 책은 의미가 남다르다.

엘렌 사모는 1986년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추방당해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25년간 한국에서 살았다.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캠퍼스 사역, 전도 및 상담 사역을 함께했다. 오대원 목사는 “나는 ‘우리의 사역’을 한 번도 ‘나의 사역’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사회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모로 사역하며 섭섭한 적은 없었을까.

“남편을 도우면서 그를 통해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땐 교회에 가서 앞자리에 앉는 게 미안해서, 그 교회 목사 사모님과 제일 뒷줄에 앉아있곤 했어요. 내 소개를 안 해줘서 인사할 기회가 없으니까 화장실에서 다른 여성들을 만나면, 길에서 모르는 외국 사람이 온 것 같이 대할 때 마음이 좀 그랬어요. 가끔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나란히 서서 인사하는 게 참 멋있어 보였어요. 문화라는 게 있지만, 사모라고 소개받고 인사할 기회가 있을 때 사모들도 자기 역할에 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끝까지 인내하되, 사랑으로 인내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애썼다. 예수전도단 활동을 하면서 24시간 집을 개방해 많은 사람이 그들의 집을 드나들었다. 세 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가족을 이뤘다. 공동체 생활이 곧 그들의 삶이 됐다.

“매일 같이 생활하니 가정끼리 오해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런 적이 별로 없었어요. 그때그때 하나 됨을 느끼면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도 잊었어요. 그 당시 응접실에서 만나 함께 공동체를 시작한 분들은 영원히 못 잊어요. ‘우리’라는 단어 참 멋있지요. 그런데 ‘우리 남편’이라고 하는 건 정말 웃겨요. 나는 하나밖에 없는 아내인데 습관적으로 우리 신랑도 ‘우리 아내’라고 할 때가 있어요. 어머 이것 보세요. 나도 ‘우리 신랑’이라고 말하네요. (웃음)”

예수전도단이 명동 YWCA에서 모임을 가질 때 대학생들이 많이 모이자,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한국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자칫 정치적인 민주화 시위로 연결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 그는 오 목사와 함께 ‘New Korea’, 한국뿐 아니라 북한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사역에 힘써왔다. 그는 여전히 일 년에 서너 차례 한국을 방문한다. 이번엔 부흥한국이 주최하는 통일비전캠프 참석차 2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탈북자들을 보면 자식 같은 마음이 들어요. 예수전도단에서 파송한 선교사 숫자와 탈북자 숫자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일부러 보낸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요.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은 북한 사람 미워할 수 있어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북한을 얼마나 더 사랑해야 하는지 몰라요. 아직 그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는 단 한 번도 한국에 온 걸, 한국을 위해 살아온 지난 날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받은 게 훨씬 많았으니까요. 받으니까 더 사랑하게 돼요. 우리가 삶으로 사랑한 것만 한국 사람들 속에 남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사랑으로 인내하면 결국 삶 전체가 기쁨의 여정이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지요.”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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