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 조선 유학생, 시대의 흐름 읽고 독립의 불을 지피다

국민일보

일본 속 조선 유학생, 시대의 흐름 읽고 독립의 불을 지피다

[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 2·8독립선언과 동경YMCA

입력 2019-02-0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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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일본 유학생들이 1920년 출옥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맨 왼쪽이 1919년 2월 8일 조선YMCA에서 “지금부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한다”고 긴급 동의했던 최팔용. 서울YMC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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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서의 첫 장. 서울YMC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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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만세!”

1919년 2월 8일 도쿄 지요다구 간다의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조선YMCA)에서 터져 나온 함성이 폭설이 내리던 거리를 갈랐다. 400여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에서 불과 3㎞ 떨어진 곳에서 독립의 열기를 분출했다. 당시 일본엔 678명의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다. 전체 유학생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무엇보다 적국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은 민족을 깨웠다.

한 달 뒤 조선 전역에선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1만세운동의 마중물이 된 것이다.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린 손병희 선생이 2·8독립선언서를 읽고 “어린 아들이 저렇게 하니 우리가 어찌 앉아 보기만 할 수 있느냐”고 한 건 유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지닌 가치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2·8독립선언은 조선을 강탈한 일제에 맞선 첫 번째 만세운동이었다. 학자들은 독립선언이 도쿄에서 발표됐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서정민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6일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적의 심장부이자 태풍의 눈인 도쿄, 그곳에서도 중심지에서 독립을 선포했다”면서 “유학생들은 일찌감치 자유 인권 자결 독립과 같은 근대 사상을 흡수했고 배운 대로 표출했다”고 했다. 그는 “2·8독립선언은 1918년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단, 국내의 독립운동가들과 삼각점을 이루면서 3·1운동을 잉태했다”고 밝혔다.

만세운동은 비밀리에 준비됐다. 하지만 2월 8일부터는 자신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란 사실을 알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일본 중의원과 귀족들에게 전달할 ‘민족대회소집청원서’ 1000부는 인쇄소를 빌려 제작했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은 한글과 영어, 일어로 써 600부를 등사기로 찍어냈다. 이렇게 준비한 청원서와 선언서, 결의문은 8일 오전 10시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정부의 각 대신과 귀족원, 중의원, 신문사로 발송됐다.

거사 시간은 오후 2시, 장소는 조선YMCA였다. 젊은이들의 패기는 하늘을 찔렀다. 일경의 눈을 피하고자 학우회 결산 총회라고 광고했다. 학우회장 백남규가 개회 선언을 하자마자 최팔용이 긴급동의로 “지금부터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한다”고 외쳤다. 강당을 가득 메운 유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예”라고 외쳤다. 곧바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2·8독립선언서엔 일본을 향한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겼다. 일본이 요구에 불응할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전(全) 조선청년독립단은 아(我) 2000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300년 장구한 역사를 유(有)하는 오족(吾族)은 실로 세계 최고 문명 민족의 일이라…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여(與)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하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행동을 취하여 오족의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범(範)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오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유할 줄을 신하노라.”

네 가지 결의문은 일제를 떨게 했다. 첫째, 한일병합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고 둘째,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셋째, 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하겠다고 밝혔으며 넷째, 이들 목적이 이뤄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血戰)을 벌이겠다고 천명했다. 일경은 강제해산 명령을 내리고 실행위원 10명을 붙잡았다. 나흘 후인 12일 조선인 유학생 100여명은 인근 히비야공원에 모여 또 다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다 해산됐다.

김용복 한신대 석좌교수는 “전 세계의 뉴스가 모여들던 도쿄는 청년들에게 독립의 꿈을 심어줬다”면서 “볼셰비키혁명부터 파리강화조약까지 속보를 보며 조선 독립 의지를 구체화했고 이를 선언서에 써 내려 갔다”고 했다. 김 교수는 “3·1독립선언서보다 현실적이고 일본을 향한 더 강한 반감이 담겼다”고 덧붙였다.

조선YMCA는 유학생들을 품었던 둥지였다. 유학생들은 YMCA에서 성경을 공부했고 세계를 배웠다. 민주주의를 경험했고 자유도 맛봤다. 다즈케 가즈히사 재일본 한국YMCA 2·8독립선언 기념자료 실장은 “당시 유학생들이 도쿄에 오면 처음 찾는 곳이 조선YMCA였다”면서 “도쿄에서 조선인이 소유한 유일한 건물이었고 유학생들이 맘 편히 기댈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유학생들은 성경부터 세계정세까지 다양한 공부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면서 “이런 대화의 끝엔 독립에 대한 바람이 싹텄고 결국 2·8독립선언으로 귀결됐다”고 했다. 이어 “조선YMCA가 없었다면 2·8독립선언이 일어나는 게 쉽질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조선에서의 3·1운동에도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뿌리는 2·8독립선언을 이끌었던 유학생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어 “2·8독립선언의 정신은 우리 현대사에서 청년 학생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나서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면서 “청년 학생운동의 정점에 있는 역사적 분기점이자 청년 정신의 샘물”이라고 평가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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