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교회 탄압 조사 가던 길 ‘아무도 기억 않는 죽음’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교회 탄압 조사 가던 길 ‘아무도 기억 않는 죽음’

사역자 구보라·마거릿과 화성 병점역

입력 2019-02-0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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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1운동에 따른 교회 피해를 조사하던 사역자 구보라와 마거릿 벨(유진벨 부인)이 탄 차량이 열차와 추돌해 순직했던 경기도 화성시 병점역. 지난 2일 병점역에서 화성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다. 인근 한신대 학생들이 내건 플래카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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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구보라(왼쪽) 선교사와 가족, 마거릿 벨(왼쪽)과 남편 유진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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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교회 피해자들의 망연자실한 모습(위쪽). 일제강점기 제암리 인근 용주사 신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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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부터 제암교회(왼쪽)와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추모탑. 제암리교회 피해자 시신을 수습해 합장한 무덤. 광주광역시 선교사 묘원 마거릿 벨(왼쪽)과 구보라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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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었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었다.

지난 2일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경기도 화성시 병점역을 향해 길을 떠났다. 1시간10분이 걸렸다. 병점역은 떡전(餠店)거리로 불렸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열리면서 영업을 개시한 이 역은 대중교통 발달과 함께 1990년 간이역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3년 수도권 전철이 연장되면서 전철역이 됐다. 이 역은 인근에 옛 조선신학교의 명성을 잇는 한신대 학부가 있어 부역명이 ‘한신대’이다. 조선신학교는 1950년 무렵 서울역 앞 성남교회(당시 바울교회) 내에 학교가 있었다. 문익환 장준하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역 서쪽 출구로 나서자 한신대 캠퍼스와 대학교회 첨탑이 보였다. 그 캠퍼스가 자리한 양산봉 뒤로 20여㎞쯤 가면 3·1운동 당시 일제 만행을 여실히 보여주는 비극의 현장 제암리교회(현 제암교회)가 자리한다.

병점역은 신도시 동탄의 중심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1980년대까지 한적한 소역 동네는 급격한 개발로 번잡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날 역 서쪽과 동쪽 출구에선 화성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역사 이용객들에게 쌀과자를 넣은 전도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예수님 만나러 가자’는 손바닥 크기의 인쇄물이었다. 사람들은 냉담하거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대했다. 전도팀은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수도권 전철역의 무질서함을 그대로 안고 있는 이 역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의 교회 탄압을 조사하고 자동차로 광주(光州)선교부로 돌아가던 미국 선교사 구보라(폴 크레인)와 마거릿 벨이 이 역 건널목에서 열차와 추돌, 즉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3월 26일이었다. 그 차는 유진벨(1868~1925·마거릿의 남편) 선교사가 운전했다. 차량에 녹스(1888~1959) 선교사까지 4명이 탑승했다. 유진벨은 찰과상을 입었고 녹스는 실명했다.

이 상황에 대해 재한 니스벳 선교사의 부인은 4월 2일 자 미국 착 편지에 이렇게 밝힌다.

‘…9시쯤 굽은 길을 만났다. 거기에 언덕이 있고 나무가 있어서 철길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차는 부산발 급행열차로 35분이나 연착하였기 때문에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들은 다 튕겨 나갔다. …경성에서 구조대가 왔고 모두 세브란스병원(당시 서울역 앞)으로 옮겨졌다. …토요일에 광주선교부 동산에서 장례를 치렀다. 영어와 한국어 장례 예배가 두 번에 걸쳐 진행됐다.’

순직한 두 사역자는 지금 광주 호남신대 구내 선교사 묘원에 안장돼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죽음’이었다. 나치 치하에서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웠던 독일 뮌헨 학생들의 저항 조직 ‘백장미단’의 장렬한 최후를 담은 소설 제목과 같았던 영광된 순직이었다.

구보라 선교사.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까지 목포발 신문기사에서 구보라 선교사의 이름이 거명된다. 1927년 5월 12일 자 동아일보는 목포면려청년회 지육부 주최 학술강연회가 (양동교회 내) 구보라기념각 상층에서 열렸다고 보도했고, 이듬해 6월 5일에는 장로회 전남노회 제20회 정기총회가 목포 양동교회에서 열렸으며 총회 마무리 다과회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대표위원 선거가 구보라기념각에서 개최된다고 알렸다.

구보라는 미시시피 출신으로 철물점을 하는 교회 장로 부부의 1녀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에 파송된 의료선교사 포사이트의 열화와 같은 설교에 감동하여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됐다. 1916년 그는 드디어 순천선교부로 발령받았고 이듬해 목포선교부로 옮겼다. 아버지에게 배운 경영관리 재능으로 선교부 재정을 맡아 성실히 일했다. 그는 한국 입국 전 장로가 됐고 철물점을 운영한 바 있다.

그의 한국행은 형 커티스(한국명 구례인·1888~1964)와 누나 재닛(구자례·1885~1979)의 영향도 한몫했다. 구례인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학자였고, 구자례는 전주와 순천에서 기독교교육과 구라(救癩)선교 활동을 했다.

마거릿 벨은 군산선교부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부위렴) 선교사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1904년 5월 ‘호남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벨의 두 번째 부인이 됐다. 유진벨 첫 부인 로티 위더스푼은 1901년 한국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마거릿은 미국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남편과 목포를 거쳐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 최초의 서양 여성이었다. ‘나는 한국인 여성들에게 좋은 구경(koogyung)거리였고 우리 방안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전도하곤 했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광주지역 복음화를 위해 병원과 학교, 교회 등을 세우는 남편을 도와 남학교와 여학교 교사를 했으며 교회 주일학교와 겨울 성경학교에서도 가르쳤다.

마거릿은 1911년 ‘선교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광주선교부 6주년 기념식을 했다. 6년 전 선교부를 개설할 때 조사 등을 빼고 인근에 기독교인이 없었다. 우리는 그때 사택 식탁을 치우고, 의자를 침대 위로 쌓아 올린 뒤 호기심 가득한 조선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주일이면 우리 방 두 개는 예배 장소가 됐다.’

구보라와 마거릿은 각기 목포와 광주에서 사역했다. 한데 3·1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유진벨 부부, 구보라, 녹스 등은 미 남장로회 한국선교회가 한국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경성 선교회의에 지역 선교부 대표로 참석했다. 이들은 선교회의 후 만세운동의 수원권역 진상 파악을 위해 선교 차(Buick)를 타고 수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던 길이였다. 유진벨은 애초 이 차량을 기차로 운송하려 했으나 일제가 군수물자 수송을 이유로 운송을 거부해 손수 몰아야 했다.

구보라와 마거릿의 순직과 관련해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 만행 조사를 하던 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암리 등 화성지역(당시 수원군) 시위가 4월에 벌어진 것으로 보아 학술적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인다. 한편 유진벨은 이날 교통사고로 재판에 넘겨져 용수를 쓰고 법정에 서야 했다.

그 비극의 사고 현장 병점역엔 한신대 학생들이 내건 태안화력발전소 사망자 고 김용균을 추모하는 플래카드가 선명했다.

화성=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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