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감성노트] 분노 감정의 해부학

국민일보

[김병수의 감성노트] 분노 감정의 해부학

분노의 고유한 기능 활용하기 위해선 감정에 지배당하는게 아니라, 내 감각 속에 통합해야

입력 2019-02-0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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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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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상처 받았다는 의미이다. 타인과 세상에 대해 실망을 느꼈다는 뜻이다. 이럴 때 억지로 참으면 병난다. 화병이 대표적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에 뭔가 걸린 것 같고, 속에서 불덩이가 올라온다. 감정이 몸속에서 탈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면 폭발하나, 마음을 까맣게 태워서 우울증을 일으킨다.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분노도 무조건 없애려고 하면 안 된다.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는 이유와 그 안에 담긴 욕구가 충족돼야 해소되는 법이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분노가 정당한가?” 만약 그렇다면 밖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모멸감을 느끼고, 부당한 이유로 자존감에 상처 입고, 고유한 자기 권리를 침해당했다면 분노를 표현해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 이런 분노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적응적 감정이다. 적응적 분노는 참아서는 안 된다. 고함을 지르며 표출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 성질 나!”가 아니라 “당신의 잘못으로 인해 내 감정이 무척 상했습니다. 화가 납니다”라고 자기 느낌을 언어화해야 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묶어서 알려준다. “당신이 나에게 사과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나’를 주어로 해서 나의 느낌과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 분노를 감당하기 어렵다면 ‘화내는 것을 잠시 미뤄두겠다’라고 마음 먹어보자. 정당한 분노를 억지로 참으려면 잘 되지 않을 뿐더러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참아야 하느냐!’라는 생각 때문에 분노가 더 커질 수 있다. 이럴 때는 ‘10분만 미뤄두고 있다가 나중에 실컷 화를 내겠다’라고 여기면 감정을 조절하기도 쉽고 그 사이에 분노의 강도도 가라앉는다.

적응적 분노는 현실 세계에서 자기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게 해 준다. 분노의 고유한 기능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안에 수용하고 자기 감각 속에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비적응적인 분노도 있다. 화가 나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수단적 분노가 그중 하나다. 감정을 대인관계에 수단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분노로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화를 내면 일시적으로 ‘내가 당신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된다. 감정적인 착각에 불과한데도 이것이 강화되면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다는 환상에 젖는다. 분노를 타인에게 쏟아내는 것이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분노는 금방 중독된다. 나중에는 사소한 일에도 분노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버릇이 튀어나온다. 습관화되고, 타인과의 정상적인 감정 교류가 차단되고 만다. 수단적 분노는 내면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정서가 아니다.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억지로 구성하기 위해 조작된 감정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갑질이 대표적인 예다. 회피로서의 분노도 있다. 진짜 감정을 분노로 덮어 버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약해지면 안 돼, 강해야 돼”라고 교육 받아온 사람은 눈물 흘리고 싶고 의지하고 싶을 때에도 ‘나는 강해져야 한다’라는 믿음 때문에 위로 받고 싶은 욕구를 회피하게 된다. 불안과 우울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이런 감정들을 분노로 감추려고 한다. 중년 남자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 사소한 일에 짜증이 늘고 분노 폭발을 보이는 데에는 이런 원인이 작용한다. 정서적 위안이 필요한데도 오히려 주변 사람에게 버럭 화를 내 멀어지게 만들고, 끝내 외로움에 빠지고 만다. 자기감정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콤플렉스와 약점을 방어하기 위한 분노도 있다.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뿌리 깊은 열등감과 자기혐오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문제를 타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강한 척, 센 척하려고 분노를 활용한다. 열등감이 큰 사람일수록 타인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과잉 반응을 한다. 웃자고 한 농담에 욱하고 달려든다. 이런 사람은 분노조절에만 초점 맞춰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야 분노조절장애도 해결될 수 있다.

분노라고 해서 다 같은 감정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분노 감정을 세밀하게 해석하고, 상황에 맞춰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를 함부로 표출해선 안 되지만, 무조건 덮어두는 것도 옳지 않다.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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