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디케가 눈을 뜨면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디케가 눈을 뜨면

입력 2019-02-13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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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는 같은데 판사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면 재판은 복불복 게임과 다를 게 없어
사법개혁은 스스로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사법부를 법을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로 생각했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조항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판사는 응당 그럴 거라는 신뢰와 공감대가 국민들 사이에 폭넓게 형성돼 있었다. 그 신뢰와 공감대는 죄를 지었으면 판사가 누구든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한다. 그래서 눈을 가린 채 한 손엔 칼, 또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가 사법부 상징으로 제격인 게다.

그 신뢰가 깨졌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디케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필요와 입맛에 따라 재판부를 바꾸고 법관 판결에 유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반기를 든 판사는 가차 없이 인사보복으로 응징했다. 그의 혐의는 40건을 넘는다. 이 정도면 유죄를 무죄로, 무죄를 유죄로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친다. 실제로 미리 정해놓은 각본에 따라 짬짜미 판결한 정황도 여럿 드러나고 있다. 그의 구속 기소는 사필귀정이다.

어두운 재판 거래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사법부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지금까지 판사들이 내린 수많은 판결이 모두 공정한 잣대에 의한 것이었느냐는 의문을 품는 사람을 나무랄 수 없는 참담한 지경이 됐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속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심에서 약속이나 한 듯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익숙한 풍경이 얼마 전 재연됐다. 수천만원의 뇌물 혐의로도 차디찬 교도소 바닥 신세를 져야 하는 항간의 장삼이사들은 수십억~수백억원을 뇌물로 줘도 잘도 풀려나는 재벌 총수들의 재판 세계를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지 30년이 넘었음에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지난달 열린 2심 재판에서 성폭행 등 혐의로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과는 전혀 다른 판결이다. 성폭력 사건은 사안의 성격상 물증 확보가 어렵다. 피해자 진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은 일관적이었다. 또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그럼에도 1심은 무죄, 2심은 유죄였다. 피해자 진술이 바뀐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결정적 증거가 추가로 나온 것도 아닌데 그랬다. 똑같은 진술과 증거에도 판결이 유무죄로 갈린다면 운이 좌우하는 복불복 게임과 다를 게 없다.

이 부회장 재판도 마찬가지다. 1심 재판부와 박근혜, 최순실 재판부는 모두 이 부회장의 뇌물 액수를 70억여원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 가운데 삼성이 지원한 말 비용을 제외한 36억원만 뇌물로 인정하고 이 부회장을 석방했다. 법정 주변에서 “재판장에 따라 지옥과 천당을 오간다”는 말이 괜히 회자되는 게 아니다. 재판 당사자는 천당으로 보내줄 천사 같은 판사가 배정되기를 학수고대할 것이다. 전관예우는 이 틈을 파고들어 독버섯처럼 자란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김경수 경남지사 1심 형량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를 법정 구속에 이르게 한 컴퓨터 등 장애방해 등의 혐의가 낯선 데다 이례적으로 형량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거기다 도주의 우려가 없는데도 구속까지 당했다. 2011년 이래 이 혐의로 재판이 진행된 사례가 50여건 있었으나 실형이 선고된 예는 단 한 차례도 없다고 한다. 이 혐의에 적용하는 법원 내부 양형기준이 최고 1년6개월인 점에 비춰볼 때 가혹하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법원은 지난해 8월 허익범 특검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범죄 소명 부족을 이유로 기각한 바 있다. 김 지사가 무죄를 자신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김 지사가 연루됐다는 스모킹건이 없음에도 드루킹 일당의 진술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내는 데 세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런데도 재판부가 너무 이들의 진술에 의존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여권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의 증거재판주의에 위배된다는 지적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판사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난은 법치주의 근간을 훼손할 수 있으나 판결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있고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신이 아닌 판사에게 전지전능을 기대할 수는 없다. 김 지사의 유무죄 여부도 현 단계에서 단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판사에 따라 천당에 갈 수도, 지옥에 갈 수도 있다면 합리적 재판이라 부르기 어렵다. 재판 당사자의 심정은 어떨까. 기본권의 기본권이라 할 수 있는 인신 구속이 달린 일인데 말이다. 법원 내에 ‘양승태 사법부’가 있고 ‘김명수 사법부’가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고 한다. 양승태 사법부의 보복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왜 그런 주장이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법원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법개혁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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