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벽 음담패설… 인간은 왜 낙서를 끄적이는가

국민일보

화장실 벽 음담패설… 인간은 왜 낙서를 끄적이는가

폼페이 유적부터 뉴욕 지하철까지… ‘호모 그라피티’의 낙서 충동

입력 2019-02-23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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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샹이 엽서에 인쇄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얼굴에 수염을 그린 작품 ‘L.H.O.O.Q.’(1919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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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1981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정상회담 중 종이에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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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작가 키스 해링이 뉴욕 도심 지하철 광고판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위 사진)과 경찰에 연행되는 모습(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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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도시 폼페이 유적지 잔해에서 발견된 낙서. 검투사 간 시합을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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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이든, 회의 중이든, 통화 중이든 따분한 상황에서 펜을 손에 쥐고 있으면 왠지 낙서를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감시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을 땐 손이 저절로 움직이다시피 한다. 어떤 글자를 적기도 하고 도형을 그리기도 하는데 종이 위의 흔적은 저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는 거의 무관하다. 왜 그런 글자나 그림을 끄적였는지 자신도 모를 때가 많다. 어쩌다 광고전단이나 신문·잡지에 사람 얼굴이 큼직하게 등장하기라도 하면 펜으로 안대를 그려 애꾸를 만들고, 설령 여자 얼굴이라도 수염을 그려 넣는다. 사진(또는 그림) 속 인물이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을 땐 어떤가. 그중 몇 개를 까맣게 칠해 이 빠진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무조건반사에 가까운 낙서 충동은 세대와 계층, 성별, 인종, 직업 등 인구학적 특성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낙서는 개인 물품이나 폐쇄된 공간을 넘어 거리 곳곳에 남겨진다. 주로 보게 되는 장소는 건물 뒤 담벼락이나 공용화장실, 공중전화부스, 관광명소 같은 곳이지만 실제 낙서는 ‘이런 곳에까지 흔적을 남기다니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뤄진다. 본능적인 낙서 행위의 밑바닥에는 어떤 욕구가 깔려 있는 걸까. 전문가들은 낙서가 억눌린 욕구를 해소하려는 시도이자 자기 존재감이나 생각을 드러내거나 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정서·심리 판단자료로서의 가치와 내적 치료 과정으로서의 활용 가능성에 주목한다.

초등생부터 레이건까지

낙서는 유치한 행동으로 치부되지만 종이에 뭔가를 쓰거나 그리는 수준의 낙서는 아직 학교도 안 간 어린아이부터 나이 지긋한 회사 중역까지 세대와 계층을 가리지 않고 이뤄진다. 2012년 3월 영국에선 마거릿 대처 전 총리 관련 기록물이 공개됐는데 그중 가장 관심을 끈 것 가운데 하나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낙서였다. 낙서는 레이건이 1981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정상회담 도중 다른 정상들 몰래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한 사람 머리들과 근육질인 남자의 몸, 커다란 눈이 그려져 있었다. 공개된 낙서를 본 심리학자들은 레이건이 회담을 지루해 하며 낙서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내놨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2년 7월 버지니아 지역 유세 중 지역방송 인터뷰에서 직접 자신의 낙서 취미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가 상원의원 시절 상원 본회의 중에 그린 낙서는 자선 경매에 출품해 2075달러에 낙찰됐다.

역사적으로 낙서의 기원은 원시시대로 거슬러간다.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과 프랑스 라스코·쇼베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들은 낙서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좀 더 낙서다운 낙서는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잿더미에 파묻혔던 폼페이 잔해에서 발견된 글과 그림들이다. 주로 건물 외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조각들 위에는 검투사의 대결 장면이나 시인의 얼굴, 연인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낙서가 사회현상으로 대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계급 갈등, 도시의 척박함 등을 풍자한 만화가 유행하면서 소외계층이 이를 따라 그린 거리낙서가 등장했다. 20세기 거리낙서의 주요 무대는 미국 뉴욕이었다. 1960년 후반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을 겪던 미국에서 ‘담벼락 낙서’(그라피티)는 사회적 발언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등장했다. 주로 소수인종이 낙서를 통해 자신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나 소외감을 드러냈다. 이들에게 낙서는 불만 표출 수단이면서 자기 삶을 확인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편이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담벼락 낙서는 1980년대 들어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표 작가인 키스 해링은 페인트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다른 낙서화가들과 달리 분필을 사용하고 밤이 아니라 낮에 낙서를 했다. 지하철 광고판에 그림을 그린 해링은 경찰에 수차례 체포돼 벌금을 물면서 5년간 약 5000점의 낙서를 남겼다. 1971년 뉴욕 지하철 벽면 곳곳에 등장한 ‘TAKI(타키) 183’이라는 낙서는 익명으로 활동하던 낙서화가들에게 사인과 같은 ‘태그(Tag)’를 유행시킨 계기였다.

‘TAKI 183’은 10대 청소년이 자신의 애칭과 집주소를 조합해 남긴 표식이었다. 낙서화의 초창기 시도로는 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샹의 1919년작 ‘수염 난 모나리자’가 유명하다. 뒤샹은 엽서에 인쇄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얼굴에 연필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고 프랑스어 ‘Elle a chaud au cut’(그녀는 엉덩이가 화끈거린다)와 발음이 같은 이니셜 ‘L.H.O.O.Q’를 그림 아래 적었다.

인간은 ‘호모 그라피티’

낙서는 개인적 행위이면서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낙서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보편적 행위라는 점에서 인간은 ‘낙서하는 존재(mo Graffiti)’로 설명되기도 한다. 어린아이 시절 집 안에서 하던 낙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범위가 급격히 확대된다. 낙서 내용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을 끼적거리는 수준에서 의미와 의도를 가지고 쓰거나 그리는 식으로 구체적이 된다. 중·고등학교 학생은 초등학생보다 더 다양한 내용으로 낙서를 하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공중화장실과 시외버스터미널 휴게실, 유명 관광지처럼 모두에게 공개된 공공장소에서는 더욱 다양한 낙서가 발견된다. 명소에는 누가 왔다간다거나 누구를 사랑한다는 식의 글귀가 꼭 새겨져 있다.

자발적 행위인 낙서의 기능과 목적에 대해서는 ‘정서적·심리적 배설’ ‘자기표현’ ‘놀이’ ‘소통 시도’ ‘창작’ 등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낙서가 분노와 미움 같은 감정의 응어리를 드러내는 주요 수단이라고 본다. 증오의 대상은 특정인이 되기도 하고 일(사회인의 경우)이나 과제(학생의 경우)처럼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배설로서의 낙서는 욕설과 성적 표현, 폭력적 묘사가 주를 이룬다. 성적 표현은 남자 중학교나 남자 화장실처럼 남성들의 공간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는데, 전문가들은 그 이면에 성적 대상과 성행위에 대한 호기심이나 억압된 성적 욕구가 깔려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낙서는 충동을 곧장 실행에 옮기지 않고 간접적 방식으로 바꿔 표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설명도 있다. 동아대 대학원 교육학과 김선희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직접 표출은 싸움이 되거나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으나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낙서를 하는 것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감정이 진정되고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이루어지면서 낙서행위에 대한 재미도 느껴져 폭발할 것 같던 감정이 해소된다”고 설명했다.

낙서는 자신의 심리와 정서를 다양한 표현들로 나타내는 은밀한 자기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이나 이름 따위를 쓰게 되거나 ‘누구야 사랑해’ 같은 표현을 즐겨 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수업시간에 하는 낙서 등은 스트레스 해소와 함께 놀이의 기능을 갖는다. 수업이나 공부 자체를 지루해하는 학생들은 자기 책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서 낙서라는 자기만의 행위를 통해 지루함을 해소하게 된다. 바닷가 모래밭이나 눈 쌓인 땅바닥엔 발자국을 내거나 나뭇가지 따위로 이름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식의 낙서는 체험적 재미와 결과물에 대한 만족을 추구하는 행위로 설명된다. 타인과의 소통수단으로 낙서를 하는 이들은 주로 자신의 감정과 문제 상황, 견해 등을 드러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어 한다. 어떤 낙서에는 마치 인터넷 게시물에 달리는 댓글들처럼 반응이 꼬리를 물기도 한다. 서로 묻고 답하거나 각자의 낙서를 비판하기도 한다. 고민을 털어놓은 낙서에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는 경우도 있다. 이밖에 사랑, 행복, 합격, 승진 등을 기원하는 낙서는 실제로 무언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보다 자기암시를 통한 위안에 가깝다. 간절한 소망과 이뤄지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을 낙서로 발산해 심리적 안정감을 유도할 수 있다.

내면을 표현하게 되는 낙서의 특성은 미술치료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용된다. 미술치료는 낙서를 통해 억압된 심리나 정서를 해방시켜 치유를 도모하는 활동이다. 전문가들은 낙서에 억눌린 욕구를 해소하는 기능이 있다고 설명한다. 한 교육상담 전문가는 “낙서는 학업 등 일상에 대한 스트레스 표출이거나 그에 대한 해소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며 “다른 행위에 비해 남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바람직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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