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사람이 죽어야 일하는 국회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사람이 죽어야 일하는 국회

입력 2019-02-22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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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법 윤창호법 김용균법… 죽음이 있어야 만들어지는 법
20대 발의 법안 70%가 계류 중… 文의장도 “이게 국회냐”
국회 무노동, 우리 삶을 망친다 일하게 만들 여러 장치 갖추고
그보다 먼저, 어떤 형태로든 국민의 분노를 보여줘야


국회는 사람이 죽어야 일을 한다. 지난해 통과된 안전 관련 법안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어린이집 통학차량에 갇힌 네 살 아이가 7월 폭염 속에 숨졌다. 아이가 내리지 않은 것을 모르고 차문을 닫은 채 방치한 결과였다. 두 달 뒤 ‘잠자는 아이 확인 법’이라 불리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통학차량의 하차확인 장치를 의무화한 이 개정안은 이미 2년 전에 발의돼 있었다. 잠자는 아이 확인 법안이 국회에서 잠을 자는 동안 차에서 잠이 든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

제천과 밀양에서 대형 화재로 73명이 사망한 뒤에야 국회는 상임위 캐비닛에 오래 묵혀뒀던 소방법안들을 꺼내 지난해 1월 통과시켰다. 군복무 중이던 청년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으니 음주운전 처벌 및 단속 강화 법안을 처리했고, 비정규직 청년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니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을 만들었다. 김성수법(이것은 가해자 이름이다), 윤창호법, 김용균법, 임세원법…. 사람 이름을 붙여 부르는 법안이 부쩍 많아졌는데 누군가 죽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사람이 죽어야 일하는 국회를 향해 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일하라고 재촉하는 몸부림 같아서 이런 작명은 볼 때마다 서글프다. 거꾸로 말하면 국회가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통학차량 아이처럼 제때 법을 만들었으면 살았을 수 있는 이들이 간신히 이름만 남긴 채 스러져 갔다. 국회의 무노동은 예산 낭비의 차원을 넘어 우리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슈가 됐다고 다 국회가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많은 학부모가 지지했던 유치원 3법은 패스트트랙이란 역설적 제도에 방치돼 있다. 초등 1·2학년 방과 후 영어수업을 위한 공교육정상화법안이 처리되지 않아 올해 시행을 기대했던 학부모를 허탈하게 했다. 여성들이 분노했던 몰카 범죄의 불법 수익 환수법안, 서울 등촌동 전처 살인사건에 귀추가 주목됐던 가정폭력방지법안, ‘안전이별’이란 신조어를 낳은 데이트폭력 범죄의 처벌법안, ‘노 민스 노(No Means No)’ 원칙이 담긴 형법 개정안을 비롯해 100건이 넘는 미투법안은 사회적 관심이 매우 컸지만 국회를 일하게 만들지 못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017년 정부와 국회에 6개 분야 16개 현안의 정책건의를 전달했다. 지금까지 일부라도 반영된 건 절반에 불과하다. 반영된 것 중 국회가 주도한 사안은 2건뿐이고 반영되지 못한 것은 대부분 국회 입법 장벽에 가로막혀 표류하고 있다. 대표적인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발의된 지 7년이 넘었다. 올해 들어 국회 본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2월은 물 건너 간 듯하고 3월도 불투명하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탄력근로제 확대에 합의했지만 이를 위해 근로기준법을 개정해야 할 국회는 여전히 보이콧 상태에 있다.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바꿔야 하고 카풀 문제도 서둘러 풀어야 하는데 이해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뤄진들 입법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몇 번만 더 하면 20대 국회에서 보이콧은 20번을 채운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게 국회냐”고 말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선관위에 제출한 공약 첫머리에 연령별 실업급여 차등화 폐지안을 올렸다. 청년을 위한 이 법안은 이미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 발의한 것이었다. 자유한국당의 앞 순위 공약인 소형 승용차 유류세 인하 역시 한국당 의원이 발의한 세법 개정안에 들어 있었다. 중요하게 다뤄진 대다수 공약이 그랬다. 법안을 만들어도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으니 다시 선거 공약에 갖다 쓰고, 그 공약을 이행하느라 또 법안을 만들지만 국회의 무노동에 잠들고 마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20대 국회는 법률안 최다 발의 기록을 세울 것이다. 19대가 1만7000건쯤 되는데 20대는 벌써 1만8000건을 넘어섰다. 70%가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계류돼 있다. 한국이 아무리 복잡한 사회라도 1만8000개 법안을 벗어난 문제는 많지 않다. 그러니 법안과 공약의 재활용 메커니즘이 생겨난 것 아닌가. 국회가 본연의 업무인 법안 심사와 처리만 제대로 해도 한국 사회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

국회의 무노동에 무임금 원칙을 들이대는 건 너무 순진하다. 일하지 않는 국회가 국민에게 끼치는 피해는 그들이 받는 세비의 수준을 크게 넘어선다. 죽고 사는 문제와 먹고사는 문제가 입법 여하에 달려 있는데 고작 임금 정도로 책임을 물을 순 없다.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국회혁신자문위원회는 상임위마다 상설 소위를 설치해 주 1회 이상 개최를 의무화하고, 매월 1일 임시국회가 시작되도록 법제화하는 방안을 냈다. 잠자는 법안이 없도록 발의 후 일정 시한 내에 입법 또는 폐기 여부를 결정토록 제도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장치를 만들기에 앞서 국민의 분노를 보여주는 일이 더 시급해 보인다. 우리 삶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집단을 그동안 너무 느슨하게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원래 그런 이들이라고 포기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도 저렇게 일하지 않고 버티는 것일 수도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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