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복제공장 같은 교실의 살풍경 직격… 90년대 10대들의 성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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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은 시대다] 복제공장 같은 교실의 살풍경 직격… 90년대 10대들의 성가로

(22)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1994)

입력 2019-03-13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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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의 등장은 세계 대중음악의 마지막 혁명이다. 그것은 적어도 한 세기 이상, 아니 어쩌면 1000년 이상 지속된 선율의 주도권을 허물고 대중음악의 질서를 원시의 구음(口音) 상태로 되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리듬이라는, 몸의 언어의 시대를 열었다. 랩의 고향은 미국 대도시의 뒷골목이었다. 흑인은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힙합이라는 거대한 서브컬처(하위문화) 양식을 구축했는데, 그 핵심을 보자면 춤은 브레이크 댄스이며 음악은 랩이었다.

‘문화 대통령’의 등장

서브컬처는 백인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힘없는 소수의 항변이었다. 이들은 정교하게 짜인 운문의 수사학 대신 거의 욕설에 가까운 산문을 속사포같이 쏟아냈다. 선율의 권위를 아예 무시하고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리듬을 강조했고 노래를 언어화하는 데 성공했다.

슬럼가 출신 흑인 아티스트들은 지배 질서에 대한 조소와 전면적인 투쟁을 담은 메시지를 끊임없이 토해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랩은 백인 문화산업 자본가들 손에 의해 신상품 댄스뮤직으로 순화되는 세속화의 길을 추가하게 된다.

아울러 랩 음악은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뒤엎는 가장 강력한 신흥 세력이 됐다.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앨범은 랩의 무시무시한 전복적인 에너지를 탑재해 일거에 90년대 신세대 감수성의 정점으로 부상한다. 이 앨범에 수록된 두 개의 랩 음악, 즉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는 각각 댄스홀 랩의 순화된 상업주의와 랩 음악 본연의 태도인 전투적 문제의식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팀이었다. 92년 ‘난 알아요’를 발표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이 팀은 기성세대를 향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10대들을 열광케 만들었다. 사진은 과거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고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 왼쪽부터 양현석 서태지 이주노. 국민일보DB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 이후 역시 주류를 이룬 흐름은 말할 것도 없이 전자였다. 잼과 노이즈, 김건모와 박진영, 그리고 룰라로 이어진 아이돌 스타의 욱일승천하는 기세는 다른 모든 음악을 무력화시켰다. 후자의 대표적인 주자로는 2인조 랩 그룹 듀스를 간신히 지명할 순 있지만, 그룹의 해체와 멤버 김성재의 돌연한 죽음으로 이현도 홀로 그 짐을 지게 됐다.

김건모와 신승훈, 그리고 H.O.T.의 팬들과는 다른 서태지 지지자들은 현실 탈출의 해방감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환상을 동시에 경험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앨범은 그런 욕망을 대리 충족시켜주는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94년의 세 번째 앨범에는 거기에다 직설적인 현실 비판이라는 무기가 추가로 탑재돼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의 네 번째 앨범에 이르러 하나의 문화적인 전선까지 형성하게 된다. 이 댄싱그룹의 리더는 이 포맷의 내부적 한계를 절감했으며 적대자들의 완강한 압력 앞에서 후퇴와 침묵을 결심했다.

90년대의 이 작은 전복은 서태지에게 ‘문화 대통령’의 영예를 선사해주며 4년 만에 제1막을 내렸지만, 그의 세례를 받은 열혈 지지자들은 은퇴 선언 이후에도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그가 분만한 문제의식을 재생산하는 놀라운 지속력을 보인다. 이 지지자들은 그들의 우상이 표표히 무대에서 사라진 뒤에도 앞서 열거한 90년대의 슈퍼스타들의 추종 세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전투적인 단결력을 보여줬고, 여론 형성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에게 서태지는 ‘오빠’도, 성공한 엔터테이너로서의 ‘스타’도 아니었다.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이름이며, 내면을 가로지르고 있던 발산의 욕망을 응축시킨 이름이었다. 나아가 앞의 세대와 자신의 세대를 확연히 구별 짓는 정체성의 이름이기도 했다.

서태지는 이렇게 제도와 욕망과 세대의 ‘불연속의 문지방’을 밟고 서 있었다. 그가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를 앞세워 홀연히 나타났을 때, 새로운 감수성을 갈급하던 10대들은 순식간에 몰표를 몰아 주며 문화적 대리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서태지는 기성세대들에게는 그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존재일 뿐이었다.

첨단의 시대에 그가 숱하게 명멸해 간 엔터테이너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앨범이라는 하나의 텍스트 속에 극단적인 양면성의 대립을 함축했다는 데 있다. 그는 대중적인 취향과 독자적인 목소리를 양립시키는 데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유행을 좇는 스타 추종 그룹과, 자신의 수용 행위를 분석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마니아 그룹 양쪽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외줄 타기를 즐겨 감행했다. ‘주어진’ 음악만 향유하던 어린 수용자들은 서태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했다. 바로 이 지점은 트로트의 아성에 대항해 통기타라는 청년 문화의 문법을 성립시켰던 70년대의 작은 반란과, 매너리즘에 저항했던 80년대 중반 언더그라운드 혁명에 뒤이은 90년대의 전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세대의 성가 ‘교실 이데아’

94년 9월 4일 오후 9시 MBC ‘뉴스데스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세 번째 앨범이 발매 보름 만에 130만장을 돌파했으며 통일과 교육 문제를 다뤄 지지자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정규 뉴스의 보수성을 넘어서는 단순히 이례적인 사건의 차원이 아니었다. 이 3인조 그룹이 90년대의 한복판에서 대한민국의 문화를 결정짓는 데 얼마나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를 유감없이 느끼게 해준 작은 장면이었다.

세 번째 앨범이 몰고 온 충격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교실 이데아’였다. 이 노래는 망가진 대한민국 교실의 묵시록이었다. 이 그룹의 음악 감독이자 전곡을 작사·작곡·편곡했으며, 주요 연주 부분까지 담당한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를 통해 이 땅의 교실은 모든 개성과 가능성,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압류한 단순 복제 통조림 공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닫힌 미로 속에서 우리들의 소중한 삶이 어떻게 그 고귀함을 회복할 수 있을지 물었다. 이 곡의 서막은 소음과 괴성, 무거운 기타음을 동반하며 다음과 같이 열린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이처럼 간결하게 ‘교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제도적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인한 진술이 있었던가.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칼날이 사정없이 춤추던 때에도 교육 문제에 대한 노래는 간간이 발표됐다. 익살스럽도록 경쾌한 템포인 김민기의 ‘제발제발’이나, 노래마을 3집에 실린 ‘불량제품들이 부르는 희망노래’가 대표적이었다. 공윤의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음반을 내 파문을 일으킨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93년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비둘기의 꿈’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교실 이데아’는 이 비제도권의 노래들보다 훨씬 과격하게 비제도권적이었다. ‘교실 이데아’에 비한다면 앞의 노래들은 동요에 가까웠다. 핵심을 관통한 이 노래는 단숨에 10대와 20대의 가슴을 직격했다. 7080 세대에게 ‘아침이슬’과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었다면 90년대 세대의 성가는 다름 아닌 ‘교실 이데아’인 것이다.

무엇이 이 과격한 노래를 한 세대를 대변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하게 했을까. 그 대답은 바로 90년대 들어 살인적인 경쟁이 가속화된 교실의 현실이었다. 80년대만 해도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아주 낮은 편에 속했다. 우리보다 낮은 국가는 스페인 이탈리아 멕시코 그리스 정도였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를 분기점으로 90년대 한국의 자살률은 순식간에 ‘톱 5’로 부상했다. 청소년 자살률은 단연 1위로 뛰어올랐다.

완전 고용 신화의 붕괴와 가족의 해체, 그리고 오로지 일류대 진학만을 원하는 교육의 시장화는 너무 어린 나이의 낙오자들을 양산했다. 아마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구성원 모두 이 낙오자 대열의 선배일 것이다.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900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모두가 막힌/ 널 그리곤 덥석 우릴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난 알아요’의 히트로 정상에 오른 이래 2년이 넘는 동안 이들의 중심적인 이미지는 해맑음과 경쾌함이었으며 그들의 음악 또한 몇몇 트랙을 제외하면 그러한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이미지를 계속 유지할 것이란 통념을 완벽하게 뒤집어엎은 게 ‘교실 이데아’였다. 껍데기만 남은 랩의 정신을 이들은 다시 본연의 자리에 돌려놓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절망과 혼돈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한국의 대중음악이 세상의 밝은 면만 읊조려야 한다는 무언의 억압을 거절했음을 의미한다. 이 앨범을 분기점으로 서태지는 랩을 앞세운 댄스뮤직에서 얼터너티브 스타일의 록 음악으로 옮겨갔다. 비록 2명의 댄서 동료들은 역할을 잃게 됐지만 그것은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출발한 서태지의 이력을 보면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솔로로 컴백했으며, 이후에는 록의 전령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시작했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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