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수 칼럼] 리비아식 모델도, 살라미 전술도 아닌

국민일보

[신종수 칼럼] 리비아식 모델도, 살라미 전술도 아닌

입력 2019-04-03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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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고집하는 것은 협상 않겠다는 것… 간극 좁히려는 노력 필요
협상 아닌 힘의 대결은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 평화는 진보 보수 넘는 생존의 문제인 것을


협상을 결렬시킬 필요가 있을 때 이를 실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요구한 빅딜 내용이 최근 공개됐다. 사실상 리비아식 모델에 가까운 내용이다. ‘선 핵폐기 후 보상’으로 요약되는 리비아식 모델은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먼저 핵을 포기한 뒤 미국이 지원한 반군에게 살해당한 리비아 카다피처럼 될까봐 질색을 한다. 미국이 북한에 자꾸 리비아식 모델을 요구하는 것은 반대로 얘기하면 이런 것이다. 나중에 비핵화를 하는 조건으로 대북 제재 해제와 경제 지원, 북·미 수교를 먼저 하자고 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것과 같다. 미국이 북한의 이런 요구를 들어주겠는가. 미국은 나쁜 거래보다는 노딜이 낫다는 전략에 따라 북한이 결코 수용하지 못할 제안을 하는 방식으로 협상을 결렬시켰다.

리비아식 모델은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전매 특허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과정에서 악역을 맡은 그는 리비아식 모델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강경파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직후 미국을 “강도같은 태도”라고 비난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핵 보유국인 우리를 고작 얼마 되지 않는 설비나 차려놓고 만지작거리던 리비아와 비교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인가”라고 볼턴을 비난한 적이 있다. 북한 외무성은 담화를 통해 “리비아 핵폐기 방식은 안전 담보와 관계 개선이라는 사탕발림으로 무장 해제를 성사시킨 다음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 방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리비아식 모델은 우리 정부도 반대한다. 물론 경제적 보상만 챙기고 핵을 조금씩 포기하는 방식으로 비핵화 흉내만 내려는 북한의 살라미 전술도 당연히 반대하지만.

결국 리비아식 모델과 살라미 전술의 간극을 좁혀 접점을 찾는 것이 북·미 협상의 핵심이다. 상대가 수용하지 않을 요구를 계속 고집하는 것은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협상을 하지 않으면 결국 어떻게 될까. 대결구도로 갈 수밖에 없다. 대북 제재를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 만들면 가장 좋겠지만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는커녕 김 위원장이 공언한 대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미 월간지 디 애틀랜틱은 “북한은 핵무기고를 더 늘려 미국을 압박할 것이다.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에 미치지 못하는 비핵화 방안에도 만족하고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계속하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미국은 추가제재와 함께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까지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

작전계획 5027이나 5015 등은 북한의 정권 교체를 목표로 김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를 주요 타격 대상으로 한다. 미국은 스텔스 폭격기 등을 이용해 정밀하게 공격하는 옵션을 갖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 부편집인 밥 우드워드가 쓴 책 ‘공포:백악관의 트럼프’에는 볼턴에 앞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았던 허버트 맥매스터가 북한이 핵무기를 더 만들기 전에 선제타격할 것을 주장한 대목이 나온다. 맥매스터는 선제타격을 반대하는 다른 참모들에게 “당신은 로스앤젤레스 상공에 버섯구름이 솟아오르는 걸 보고 싶냐”며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지난해 초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핵 단추’ 말싸움을 벌일 즈음이다. 김 위원장은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것, 이는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협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에게도 핵 단추가 있다. 그런데 내 것은 그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하며 잘 작동한다”고 맞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주한미군 가족들을 전원 한국에서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방안까지 검토했다고 우드워드는 책에서 전했다. 주한미군 가족 철수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 직전에 취하는 마지막 조치다.

그렇다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은 성공할까. 이 책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미 정보당국과 펜타곤이 검토해 백악관에 공식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스텔스 폭격기 등을 동원한 선제타격으로는 미국이 파악하고 있는 핵무기와 핵무기 관련시설 85%가량만 파괴할 수 있다. 파악되지 않은 핵무기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리고 북한의 대응으로 핵무기가 단 하나만 터져도 한국에서 수만명이 희생될 수 있다. 펜타곤은 북핵을 완전하게 파괴하는 길은 지상 침공밖에 없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지상 침공은 북한의 반격을 촉발할 것이고 그 반격은 핵무기 공격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핵 단추 말싸움을 하던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북·미 협상은 반드시 재개돼야 한다. 한반도 평화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를 넘어 우리와 후손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신종수 논설위원 js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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