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송세영] 태안의 기적

국민일보

[빛과 소금-송세영] 태안의 기적

입력 2019-04-13 04:03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만리포해수욕장 북서쪽 8㎞ 해상에서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호가 대형 해상크레인 선박 삼성1호와 충돌했다. 유조선의 유류저장 탱크에 커다란 구멍이 나 1만900t의 원유가 바다로 쏟아져 내렸다. 당국이 긴급방제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조류를 타고 떠내려간 원유가 해안까지 밀려왔다. 조개와 물고기들이 기름 찌꺼기를 뒤집어쓰고 대량 폐사했다. 어촌과 갯벌, 백사장이 시커먼 기름으로 덮였고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전문가들은 해상 오염에서 회복되는 데 1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우였다. 전국 각지에서 120만명의 자원봉사자가 달려와 기름 제거에 나섰다. 한국교회가 앞장섰다. 전국 교회의 성도 80만명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각지에서 자원봉사자들을 싣고 태안으로 줄지어 달려가던 대형 버스들이 장관을 연출했다.

한국교회가 교단과 신학, 보수와 진보를 넘어 하나 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계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25개 교단의 교단장협의회 등이 힘을 모았다. 대형교회와 중소형교회, 미자립교회가 하나 되고 서울과 지방, 도시와 농어촌의 교회가 팔을 걷고 나섰다.

당시 발표한 ‘서해안 살리기 한국교회 선언문’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켜내지 못한 지난 시간을 회개하며 경건과 절제로 생태적 삶을 살기로 다짐한다. 한국교회는 서해안 해양사고로 피해를 입은 어민들을 위로하고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한국교회는 모든 재난 상황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하나 돼 섬기고 섬김으로 하나 될 것을 다짐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개교회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한국교회의 이름으로 봉사하기로 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한국교회봉사단이다.

태안 기름유출 현장에서의 자원봉사는 유독 힘들었다. 역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고 바닥은 미끄러웠다. 지형 특성상 장비나 도구를 쓸 수 없는 곳이 많아 수작업으로 직접 기름을 닦아내야만 했다. 바닷바람은 차가웠고 편의시설은 부족했다. 식사를 하고 휴식을 하고 용변을 보는 일도 고난이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한국교회의 이름 아래 자원봉사에 나선 이들은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서해안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피해를 당한 주민들에게 예수님의 심정으로 다가가서 주님 섬기듯 할 것이다. 자원봉사 과정에서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며 신앙적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실천에 힘쓸 것이다. 자원봉사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여러 불편한 사항들을 기쁘게 수용하며 피해 주민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태안 피해 주민들에게 무엇보다 힘이 됐던 것은 자신들의 아픔에 이웃들이 공감하고 동참해줬다는 사실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닦아낸 기름의 양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이 생업과 일상을 제쳐놓고 교통도 불편한 태안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줬다는 사실 자체가 크나큰 위안이 됐다. 주민들만 일방적으로 수혜를 본 것도 아니었다. 자원봉사자들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뜨거운 경험을 했다고, 태안에 가서 주고 온 것보다 받은 게 더 많다고 고백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태안의 기적’으로까지 불리는 데는 이처럼 정신적 정서적 연대와 지지까지 아울렀다는 측면도 작용했다.

강원 산불 피해 주민들을 보면서 태안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12년 동안 달라진 세태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고 복구할 텐데’ ‘대기업이나 부자들이 큰돈을 내놓을 텐데’ ‘인명피해도 크지 않은데’처럼 냉담하거나 미적지근한 반응들이 드물지 않다. 경제 규모도 커지고 소득도 늘었다는 데 공감 능력은 오히려 후퇴한 게 아닌가 걱정된다.

고난 당한 이들은 혼자라고 느낄 때 고통이 가중된다고 한다. 버림받고 잊힌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재난으로 생긴 정신적 트라우마를 더 깊게 한다. 심리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크고 작은 재난 후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태안의 기적을 경험한 이들은 작은 정성, 한마디의 따뜻한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안다. 그때처럼 강원 산불 피해 주민들에게도 이번 재난이 이웃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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