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이경원] 숨길 수 없어요

국민일보

[가리사니-이경원] 숨길 수 없어요

38년째 구두닦이 할머니가 지켜 본 현대사… 겉은 반짝반짝해도 속은 먼지투성이

입력 2019-04-15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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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 낙원악기 상가 옆 삼일대로 길가에서 정순덕(81) 할머니가 38년째 구두를 닦고 있다. 할머니는 좁은 구둣방 안에서 라디오를 틀어 놓고 구두에 윤을 낸다. “사람들이 종로에 가면 1000원도 쓰고 2000원도 쓴다지….” 두 어린아이의 홀어머니는 건물 청소부였다가 식모였다가 종로의 구두닦이가 됐다. 허가 내주던 종로경찰서 소년계부터 탑골공원의 노인들까지 모두가 홀로 구두 닦는 여인을 신기하게 바라봤었다. 150원 요금이 4000원이 되기까지 할머니는 종로에 앉아 사람들 걸음을 지켜봤다.

그렇게 38년, 할머니는 “구두를 보면 성품이 보인다”고 말했다. 명품이든 ‘시장표’든 구두의 주인은 걸어온 행실을 할머니에게 숨길 수 없었다. 뒤축 우그러진 신발의 주인은 성미가 급하고, 굽이 반듯하게 닳은 이는 꼼꼼하다. 거센 풍파를 헤쳐온 노인답게 인물평엔 주석이 달린다. 할머니는 “신발 구기면 화를 잘 내도 뒤끝은 없다”고 말했다. 뒷굽 양옆이 아닌 가운데만 닳은 신발은 100켤레 중 1~2켤레를 만나는데, 빈틈없긴 해도 ‘찔러도 피 안 나오는’ 사람의 것이란다.

장인의 차별점은 구두 겉보다 속을 잘 닦는 정성이다. 할머니는 휴지 두른 손을 구두 안에 쑥 넣고 손가락에 힘을 준다. 명품이든 시장표든 어김없이 머리카락 엉겨 붙은 시커먼 먼지를 한 움큼 토한다. 할머니는 축축한 먼지 뭉치에 더러운 내색을 하지 않는다. 손님들이 민망해 하면 “열심히 다니시나 보네요” 할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구두에서도 먼지가 많이 나왔었다. 1989년 어느 여름날이었다고 할머니는 기억한다. “내가 누군지 알지요?” 승용차 뒷좌석에서 내린 키 작은 양복쟁이가 땀을 훔치며 씩 웃고 있었다. 인사동에 친구 선물을 사러 왔다가 들렀다고 그는 말했다. 5공 비리 청문회 스타의 등장에 장기 두던 탑골공원 노인들이 “저 고등학교만 나온 놈” 하며 몰려들었다.

할머니 손에 딸려 나오는 먼지 뭉치를 보고 스타 초선의원은 “아이구” 하며 웃었다 한다. 그는 보좌관이 달려가 사온 200㎖ 우유의 입구를 따 할머니에게 건넸다. 소탈한 사람됨은 그의 구두가 먼저 말했다. ‘메이커’도 아니고 잔주름이 져 있었지만 단정한 데가 있었다. 할머니는 “뭐랄까, 참 참한 구두였다”고 말했다. 윤 나는 구두를 받아든 노 전 대통령은 “그저 걸레로 쓱 문지르고 출근하곤 했었다”며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구두는 발볼이 넓었다. 인근의 청진동 해장국을 좋아해 할머니의 단골이 된 이을식 전 전남지사가 길에서 정 전 회장을 만나 데려왔었다. 체격 좋은 정 전 회장은 구둣방 밖에 의자를 놓고 앉아 “일할 사람을 뽑을 때 3가지를 보는데, 구두도 본다”고 말했다. 첫째, 얼굴에 미소가 있으면 상대에게 호감을 준다. 둘째, 손톱이 바짝 깎여 있으면 일을 안 미룬다.

셋째, 구두가 깨끗하고 광이 나면 풍류를 아는 이다. ‘풍류’ 대목에서 정 전 회장과 이 전 지사는 크게 웃었다. 현대그룹의 채용 비밀을 귀로 들으며 할머니는 ‘정작 사장님 구두는’ 하고 속으로 웃었다. 우악스레 신은 태가 남은 낡은 구두였다. 할머니는 ‘행동 빠르고 화도 내겠구나’ 생각했다. 할머니가 구둣주걱을 건네자 정 전 회장은 “나는 바삐 살아서”라며 그냥 발을 집어넣었다. 그는 구두 앞코를 쿵쿵 찍곤 떠나갔다.

노 전 대통령도 정 전 회장도 이제 오지 않는다. 할머니는 같은 자리에 남아 현대사의 걸음을 계속 지켜봤다. 김두한의 후예를 자처하던 야바위꾼들은 모습을 감췄고, 종로 거리는 채워지고 한산해지길 되풀이했다. 최루탄 연기 걷힌 세상의 겉은 반짝반짝해 보였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됐고 올림픽이 열렸다. 사람들은 IMF 위기를 졸업했고 소득 3만 달러를 넘겼다.

명품이든 시장표든, 발밑에선 사실 먼지가 엉겨 붙고 있었다. 국민과 정의를 요란히 외치던 이들이 감옥에 갔다. 3만 달러를 함께 쌓은 하청 노동자들은 상여에 올라서야 거리에서 이름이 불렸다. 현대사는 겉보다 속의 먼지를 민망해 했고, 걸어온 행실을 할머니에게 숨길 수 없었다. 할머니는 “월부(月賦) 구두가 줄었다. 월수금 사흘을 일한다”고 말했다.

이경원 경제부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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