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박재찬] 아일랜드의 감자

국민일보

[뉴스룸에서-박재찬] 아일랜드의 감자

입력 2019-04-15 04:06
  • 네이버 채널구독 이벤트 당첨자 발표

아일랜드인들에게 감자는 신이 준 선물이었다. 남미가 원산지인 감자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구대륙으로 건너갔다.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식용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한 곳이 아일랜드였다. 감자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 아일랜드 농부들이 재배한 감자는 ‘럼퍼 감자’였다. 심으면 바로 싹이 나는, 종자가 필요 없는 품종이었다. 밀·보리보다 경작지를 훨씬 덜 차지하고 생산량도 많았다.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이 빈곤에서 탈출하게 해준 1등 공신이었다.

럼퍼 감자가 비극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1845년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이 휩쓸기 시작했다. 단일품종인 데다 감자밭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감자는 빠른 속도로 썩어나갔다. 5년 동안 이어진 ‘감자 대기근’으로 당시 약 100만명이 굶어 죽었다. 15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살길을 찾으려고 북미 대륙으로 건너갔다.

경제학자들은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얘기하면서 단일경작의 폐해를 종종 지적한다. 모노컬처 경제(monoculture economy)라고도 하는데, 한 나라의 경제가 몇 개의 1차 상품의 생산에 특화돼 유지되는 경우를 말한다. 브라질의 커피, 말레이시아의 고무·주석, 가나의 카카오 등이 유명하다. 20세기 초반 브라질에서는 전 국민의 90%가 커피 생산에 매달렸고, 커피가 외화 수입의 90%를 차지했다. 하지만 1929년 뉴욕증권시장의 대폭락으로 세계 경제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브라질은 직격탄을 맞았다. 브라질은 세계 커피 소비량의 30개월치를 폐기해야 했다. 단작 경제는 한 나라의 개발 정체 요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산물 생산 품목을 다양화하거나 공업 개발을 추진하는 등 경제구조를 다변화하려고 몸부림친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에드거 칸(84) 박사는 지난해 말 방한해 ‘화폐 단작 경제’의 폐해를 경고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를 떠올려 보라. 돈이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고 있다. (요즘 우리는) 황금송아지를 좇다가 이웃을 잃고 있다”고 이렇게 말했다. 쉽게 말해 돈을 최고로 여기는 시장 경제 시스템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성장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칸 박사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연일 오르내리는 뉴스의 7~8할은 직·간접적인 돈 얘기다. 살인과 폭력, 사기 사건의 기폭제가 돈인 경우는 허다하다. 경제적 소득·빈부 격차는 세대·성별·문화 갈등으로까지 번지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한 지 오래다. 돈 중심의 경제를 탈피해야 한다는 칸 박사의 주장은 그가 반평생 가까이 펼치고 있는 사회변화 운동과도 맥이 닿는다. 그는 1980년부터 ‘타임뱅크’ 운동을 전파하고 있다. 이웃을 위해 1시간 일하면 일종의 시간 화폐인 ‘타임 달러(1크레딧)’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크레딧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일종의 혈액은행 같은 방식이다. 일례로 타임뱅크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우울증세가 있는 환자의 전화 친구가 될 수 있다. 또 할아버지가 손자의 숙제를 도와주면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남을 위한 시간(비용)과 내가 돌려받는 시간(이익)이 같다. 서로 베풂을 주고받으니 자원봉사와는 또 다른 방식의 운동이다. 그는 타임뱅크가 ‘또 다른’ 돈을 심는 다종작(多種作) 경제의 일환이라고 했다. 현재 30여개국에서 500여개의 타임뱅크가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경북 구미의 ‘사랑고리’가 타임뱅크를 본떠 운영 중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마다 각종 복지정책을 늘리면서 투입해야 할 재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5년 뒤쯤이면 5명 중 1명이 노인(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가 도래한다. 돈으로만 해법을 찾는다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돈 이외의 다종작 경제가 빛을 발해야 할 때다. 정부와 민간이 함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많이 본 기사

포토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