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봉영식] 적당하면 해롭다는 김정은

국민일보

[한반도포커스-봉영식] 적당하면 해롭다는 김정은

입력 2019-04-15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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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서 가장 해로운 말이 바로 ‘괜찮았어(Good job)’야.” ‘라라랜드(La La Land)’를 감독한 데이미언 셔젤은 1985년생으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젊은 감독이다. 사실 셔젤 감독은 뮤지컬 영화인 라라랜드를 먼저 만들고 싶었지만, 워낙 무명이라서 아무도 선뜻 투자하지 않았다고 한다. 셔젤 감독이 감독과 각본을 맡은 영화 ‘위플래쉬(Whiplash)’가 공전의 히트를 하고 나서야 영화제작사들이 라라랜드에 투자했다고 한다.

위의 대사는 영화 위플래쉬에서 폭군 교수인 플레처 교수가 재즈 드러머 제자인 앤드루에게 한 말이다.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기를 꿈꾸며 셰필드 음악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앤드루가 폭언과 학대를 일삼는 플레처 교수에게 발탁되어 그의 지독한 교육방식을 견디며 성장한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앤드루는 학생을 극도로 학대하는 플레처 교수를 고발하게 되고, 플레처는 대학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플레처 교수는 반성하긴커녕 오히려 자기교육 방식을 옹호한다. 만약 조 존스가 찰리파커에게 심벌즈를 던지지 않고 “그 정도면 잘했어”라고 말했다면, 전설의 드러머 찰리파커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요즘 재즈가 이 모양이지”라고 한탄하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7번째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이슈는 문 대통령이 구상하는 남북 경협과 단계별 상응 조치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었다. 한국 정부는 대북 제재는 유지해야 하지만, 비핵화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선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하는 ‘조기수확(early harvest)’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미국이 추진하는 ‘빅딜’도 아니고 북한이 선호하는 ‘스몰딜’도 아닌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그만하면 괜찮은 수준의 합의)을 성사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상회담 시작 전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몇 가지 흥미로운 발언을 하였다. 현재 대북 제재 수위가 어떠냐는 질문에는 “적당하다”고 대답하였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해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한국이 식량과 다른 (인도주의 지원) 문제들에 대해 북한을 돕는 것은 문제없다”라고 덧붙였다. 조기수확이나 스몰딜에 대해서는 “그 딜이 어떤 것인지 봐야 한다. 다양한 딜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현시점에서 우리는 빅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확인하였다.

이런 발언들을 종합해 볼 때 한국 정부는 향후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 플러스알파를, 미국은 대규모 대북 인도주의 지원 플러스알파 패키지를 교환하면서 3차 북·미 대화 재개 단초를 마련한다는 타협안을 북한과 미국에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제안을 ‘그 정도면 괜찮다’고 받지 않으면 문재인정부의 구상은 성공하기 어렵다.

북한의 초기 반응은 부정적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문재인정부를 두고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하라고 일갈하였다. 미국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자기의 요구만을 들이 먹이려고 하는 미국식 대화법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흥미도 없다”면서 “어떤 도전과 난관이 앞을 막아서든 국가와 인민의 근본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정도면 김정은이 플레처 교수가 되어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 가장 해로운 말이 바로 괜찮았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러다가 2019년 한반도 정세가 라라랜드가 아니라 위플래쉬에 가깝게 돌아가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봉영식 연세대 통일연구원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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