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원 종이 공기청정기… 쉽고 싼 적정기술이 세상 바꾼다

국민일보

4만원 종이 공기청정기… 쉽고 싼 적정기술이 세상 바꾼다

김광일 CAC 대표 인터뷰

입력 2019-04-20 04:03
‘공기청정기 DIY(Do It Yourself·직접 만들기) 키트’를 개발한 김광일 CAC 대표가 9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책상에 누워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가슴과 책상 위에 있는 건 공기 순환 팬, 먼지 필터 등 ‘종이 공기청정기’ 조립 부품이다. 김 대표는 “값비싼 공기청정기의 효과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키트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윤성호 기자

맑은 공기를 마시는 데에도 돈이 드는 시대다. 미세먼지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공기청정기는 어느새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더 다양한 기능, 더 유려한 디자인을 내세운 공기청정기가 쏟아지는 사이 김광일(44) CAC 대표는 더 단순하고, 더 만들기 쉬운 공기청정기를 연구했다. 재미로 시작했지만 이제 자신만의 철학이 생겼다. 깨끗한 공기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 소외된 이들을 위한 ‘적정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이다.

“처음엔 제가 쓰려고 만든 제품이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나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기업에서까지 의뢰가 들어왔죠. 수익을 내려 한 게 아닌데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CAC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종이 공기청정기를 만드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는 2014년 말 ‘공기청정기 DIY(Do It Yourself·직접 만들기) 키트’를 개발해 이름을 알렸다. 공기를 순환하는 ‘팬’과 먼지를 걸러주는 ‘필터’, 겉을 감싸는 종이박스로 구성된 이 제품은 ‘공기 중의 먼지를 거른다’는 본연의 역할만 남긴 공기청정기다. 가격은 3만~4만원대, 전기요금은 하루 8시간 가동 기준으로 한 달에 100원도 들지 않는다.

김 대표가 종이로 공기청정기를 만든 계기는 평범했다. 갖고 싶은 고가의 공기청정기를 살펴보니 내부 구조가 의외로 간단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김 대표의 눈에 들어온 건 신발을 담는 상자였다. 상자를 오리고 컴퓨터에 달려있던 팬을 넣어 먼지가 붙는지 먼저 실험했다. 이후 기성 제품으로 나온 필터를 모조리 구입해 가장 싸고 적합한 형태를 찾았다. 김 대표는 “만들면 만들수록 욕심이 생겼다. 지금의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150여개의 모델이 있었다”며 “‘무언가를 만드는 삶이 이렇게 재밌구나’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말했다.

주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대량 주문까지 들어오면서 김 대표는 2015년 3월 연구개발기업 CAC를 설립했다. 종이 공기청정기는 CA인증(한국공기청정기협회가 효율, 소음 테스트를 하고 주는 인증)을 받을 수 없어 교육용 ‘조립 키트’로 판매했다. 원통형 필터에 팬만 부착한 디자인을 추가했다. 저렴하고 친환경적이라 대부분 공공기관, 기업 등이 교육이나 기부 용도로 구매한다. 한 유명 공기청정기 업체는 자사 제품 대신 CAC의 제품을 저소득층에 기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CAC의 공기청정기를 베낀 ‘카피 제품’이 줄줄이 생겨났다. 김 대표는 이들 제품에 대한 특허를 갖고 있지만 제품을 모방한 데 대한 별다른 대가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누가 더 싸게 만드는지 경쟁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많이 보급되면 좋은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비즈니스는 상품을 구매할 고객에게 적합한 기술과 서비스를 파는 행위예요. 다시 말해 ‘구매하지 못하는 고객에게는 팔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 구매 능력이 없는 사람을 위한 기술은 누가 만들까요?”

CAC는 회사라기보단 온갖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개발자의 놀이터’다. 김 대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신념으로 스마트 농장부터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로봇까지 개발 영역을 확장했다. 종이 공기청정기는 소위 돈 되는 장사도 아니고 CAC의 주력 상품도 아니다. 그럼에도 손을 떼지 못하는 건 이 사업이 ‘비즈니스’가 아닌 ‘적정기술’이어서다.

적정기술은 최첨단이 아니어도 사용자에게 적합하고 필요한 기술을 말한다.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빈곤을 퇴치하는 기술로 여겨진다. 김 대표는 고가의 공기청정기를 살 수 없는 ‘환경 난민’이 미세먼지에 노출됨으로써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싸고 좋은 기술이 나쁜 건 아니지만 소비자는 (기술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정기술을 창조하는 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이에요. 기술은 얼마든지 널려있지만 진심이 있어야 생각이 떠오르죠.”

김 대표는 최근 산소를 생성하는 고체 파우더를 DIY 제품에 삽입한 ‘산소 발생 공기청정기’를 연구 중이다. 밀폐된 실내에서 공기청정기를 작동하면 이산화탄소가 높아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미세먼지에 관심을 갖다보니 자동차 엔진부 빈 공간에 설치하는 필터도 개발했다. 자동차가 달리면 필터로 공기가 통과하면서 미세먼지를 걸러내는 원리다. 차량 한 대를 ‘움직이는 공기청정기’로 만드는 셈이다. 김 대표는 “한 달간 차에 달아 실험한 결과 서울에 달리는 모든 차량에 이 필터를 장착하면 눈에 띄는 미세먼지 저감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왔다”며 “필터는 빨아서 쓸 수 있는 반영구고 가격도 10만원대로 저렴하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경영학, 건축학, 디자인컴퓨팅 등을 공부하고 10년간 대학 시간강사로 일했다. 종이 공기청정기를 만들고 마흔살이 돼서야 본격적인 개발자의 길로 들어섰다. 기술을 공부하며 김 대표는 ‘한국의 기술 수준이 굉장히 낮다’고 느꼈다고 한다. 개인의 역량은 뛰어나지만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본 경험도, 기술도 없다. 그는 “현재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분야는 소프트웨어”라며 “서비스 업종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개인의 부가가치가 높을 수 있지만 전체 산업을 일으키지는 못한다”고 꼬집었다. 만들고 고쳐 쓰는 문화를 ‘가난한 사고’로 여기는 것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마인드스톰(로봇을 만들고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레고 모델)이나 피지컬컴퓨팅(현실 세계 데이터를 소프트웨어 형태로 처리한 뒤 여러 장치로 표시하는 것) 등 첨단 기술을 배우는 비용은 나날이 높아진다. 제대로 된 기술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점점 뒤처진다. CAC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적정기술로 ‘가상 조립’ 프로그램을 개발해 이달 안에 무료 배포할 예정이다. 아두이노(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전자보드)를 이용한 다양한 활동을 가상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구현한 것이다.

김 대표는 CAC만의 고부가가치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그는 “종이를 오리더니 여기까지 간 사람도 있구나, 하는 성공 사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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