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 의지하고 따른다는 믿음으로 역경 버텨

국민일보

주님만 의지하고 따른다는 믿음으로 역경 버텨

목회는 영권(靈權)이다 <2>

입력 2019-04-1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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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철 송도가나안교회 목사가 1980년 2월 교육전도사 시절 서울 상록장로교회 중·고등부 수련회를 인도하고 있다.

“철아, 서울 사는 이모라 카더라. 30분 뒤에 전화가 올 끼다. 늦지 않게 오그라.” 마을 이장댁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모가 서울로 올라오라 했다.

그렇게 1978년 난생처음 거제도를 벗어나 배를 타고 마산까지 간 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철아, 서울 가면 사람들이 코 베어 간다 카더라. 조심해라이.” “예, 알겠습니더.” 어머니 말씀대로 나는 정말 사람들이 다가오면 코부터 잡았다.

서울에서의 삶은 모든 게 생소했다. 밤이 되니 자동차와 냉장고 소리가 났다. 신기했다. 창동 근처 하평교회에 출석했는데 청년 중 신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한신 교단 소속 직영신학교인 한양신학교에 나를 소개했다.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등록금으로 쓰라며 돈을 부쳐주셨다. 어려워진 가정형편에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만든 돈이었기에 쓸 수 없었다. 돈을 돌려보내며 편지를 썼다.

“어머니, 저는 목사님이 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셔서 엘리야를 먹이셨듯 학비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독학이 시작됐다. 당시 신학교 교무처장인 김갑수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지금 당장은 등록금이 없습니다. 일단 입학을 시켜주시면 갚겠습니다. 주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과연 선지학교였다. 피아노와 영어가 가능했던 나는 김 목사님이 사역하던 성북교회 교육전도사로 특채됐다. 신학교 옆에 기숙사도 있었다. 주변의 사랑의 손길로 생활했다.

한양신학교 2학년 때 입대를 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연대 군종병으로 밤낮없이 복음전파에 힘썼다. 제대 직전 결혼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고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서울에 온 상황이었다.

요즘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지만, 당시는 3년 단독목회를 하면 가능했다. 졸업하자 의정부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회자 청빙이 들어왔지만 개척을 선택했다.

1986년 개척지를 찾기 위해 서울 변두리를 걷고 또 걸었다. 버스 탈 돈도 없었다. 당시엔 ‘교회 개척을 하려면 100군데 이상은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돌다가 상계동 들판까지 갔다.

낡은 옛집이 즐비했다. 쓰레기장 같은 빈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터를 아주 싸게 빌렸다. 추운 겨울 눈을 맞아가며 보름간 쓰레기를 치웠다. 문제는 천막이었다. 기도 중 선배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와서 간증하라고 했다. 간증을 마쳤더니 5000원을 주시면서 교회개척에 보태라고 했다.

그 돈으로 천막을 샀다. 그리고 손수 천막을 치고 세계선교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입당하는 날 목사님들이 오셔서 “세계선교교회가 아니라 빈민교회라고 해야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1년간 고생하면서 목회하는데 상계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교회는 결국 철거됐다.

그때 교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상가로 갈 전세금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상가를 계약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돈도 없으면서 자기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계약은 파기됐고 빌려서 충당한 계약금마저 갚아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전세금을 뺐다. 신혼살림은 상계동 길바닥에 내놨다. 아내는 처가로 가고 나는 거리를 헤매는 신세가 됐다. 정말 사는 게 힘들었다. 그렇게 교회 문을 닫고 나니 돈 걱정 안 하는 목회를 하고 싶었다.

1987년 목회지를 수원으로 옮겼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 6만원 하는 지하 33㎡(10평) 공간을 빌려 예배를 시작했지만, 주님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철학은 바뀌지 않았다. 자립할 때까지 생활비를 지원하겠다는 교회가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목사님, 생활비를 신경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주님만 믿고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간이의자 10개를 놓고 시작한 교회에 1년 만에 10여명이 모였다. 2년 차엔 그 옆 새로운 건물 132㎡(40평)로 옮겨갔고, 3년 차엔 50명이 모였다. 개척 5년 차엔 전세 7000만원 하는 2층 공간을 단독으로 쓰게 됐다. 그러나 더 큰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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